※ 전생기억환생패러디 + 이능력 세계관
바람에 질식할 것 같았다.
*
피유우우우우우.
푸우우우우우우.
누군가의 숨 소리가 사무소를 규칙적으로 울렸다.
대낮인데도 형광등을 죄 꺼두어 반쯤 그늘이 차오른 공간이었다. 창문마다 한 글자씩 붙인 촌스러운 고딕체 스티커, '청소부' 틈새를 비껴 들어온 봄 햇살이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구석구석으로 음영이 가지처럼 뻗어나간 사무실은 커다란 한 폭의 수묵화같았다. 그 수묵화의 정 가운데 긴 창유리를 등진 책상 위로, 한 구둣발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호랑이 가죽을 커버처럼 씌운 고동색 가죽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마호가니 책상에 얄쌍한 다리를 방만히 걸친 사내는 그마저도 부족한지 아예 신문지를 얼굴에 올린 채 오수를 즐기는 중이셨다. 푸우우우.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신문지가 가볍게 들썩였다. 지금 그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쾅!
"두목!"
"⋯⋯."
철제 문이 부서질 듯 열리는 동시에 뚝, 숨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몇 초 뒤.
"피유우우우."
"아 자는 척 하지 마십쇼! 손님입니다!"
"푸휴우우우."
"이번엔 진짜 확실하다니까요? 짭새도 아니고 건너 동네서 정찰 온 것도 아닙니다. 월척이요, 월척!"
"퓨⋯⋯."
"교복입은 학생이라고요!"
오르락 내리락하던 신문지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바스락. 마른 팔이 신문지를 슬쩍 들추자 아래 점이 콕 박힌, 반쯤 내려깐 길고 얇은 눈이 드러났다. 권태가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가 짧게 묻는다.
"여섯?"
"예?"
"여자 둘에 남자 넷?"
"어, 맞을걸요? 맞슴다. 얼레, 미리 약속된 겁니까?"
"아니."
"그런데 어떻게…."
"돌려 보내."
쩌억. 송곳니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하품하더니 도로 신문지를 덮고 등을 젖히는 천하태평의 어린 '두목' 앞에서, 당황한 나곡이 몸을 잔뜩 수그리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꽤 뜯어낼 것 같은데…."
"쯧."
"쥐어 박아서라도 돌려 보내겠슴다!"
"타일러서."
"쥐어 박고 타일러서 돌려 보내겠슴다!"
"그냥 타일러서!"
"쥐어 박지 않고 타일러서 돌려 보내겠슴다!"
사내는 다 귀찮다는 듯 손을 대충 휘저었다. 보이지도 않을 폴더폰 인사를 넙죽 건넨 나곡은 즉시 문으로 돌진했다.
콰아앙!
그리고 벽으로 '튕겨났다'.
그는 고작 열아홉에 구십키로에 달하는 거구였다. 그냥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전신이 근육질이라 칭찬이 박한 두목마저 '이 뇌까지 근육으로 꽉 찬 새끼'라고 여러 번 칭찬한 적 있다. 그를 순수한 완력으로 종잇장처럼 날려버릴 수 있는 건 번충이 유일했는데, 형님은 지방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뿌연 먼지 틈으로 사람 인영이 보였다. 작은 체구. 능력자다. 대가리가 핑핑 도는 와중에도 판단을 마친 나곡은 힘부터 끌어올렸다. 사람을 극한의 밑바닥까지 몰아 붙이는 조직 훈련의 성과였다. 어떤 간 큰 새낀진 모르겠지만⋯.
"아서라."
그때, 산들바람처럼 무감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이 와중에도 신문지는 여전했다.
"멧돼지는 건드리면 화만 돋궈."
"알고 계시니 사과는 안 하겠습니다."
끼이익. 뜯어지다시피 한 문 앞으로 침입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곡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 남학생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열여덟 남짓한, 아주 준수하게 생긴 외양이었다. 입술이 터져있다는 것만 빼면 완벽했을 것이다. 그 뒤로 다섯 명의 학생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걸어들어왔다. 하나같이 인물이었고, 하나같이 막 생긴 상처를 달고 있었다. 나곡이 입구에서 그들을 확인한 5분전까지만 해도 없던 상처다.
분명 저들 덩치의 세배는 되는 문지기를 남겨두고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쓰러진 문지기를 발견한 다른 식구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 다섯은 순식간에 우글우글한 장한들에 둘러싸였다. 틀어쥔 쇠파이프며 야구 배트 따위에서 제각각의 기운이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녹림. 미등록 이능력자의 소굴.
지하철 광고판, 화장실 거울, 반짝이 슈트를 입은 무명가수가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뽕짝을 부르는 티비 광고에서 곧잘 보이는 친숙한 이름의 실상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하위 이능력자나 사기꾼과 진배없는 던전 채굴꾼, 전과자, 빚쟁이. 갈 곳 없는 오합지졸이 저승 전 마지막으로 닿는 종착지. 특수청소대행업체를 내걸고 홍보하지만 이를 모르는 시민은 없으니, 일종의 사채와 비슷했다. 없어지지 않는 불법은 도시 끄트머리에 바글바글 들끓는다. 이 거리는 도시쥐의 시궁창이다.
침입자들은 어떻게 봐도 아무것도 모른 채 거리에 흘러든 외부인이었다. 한가락 한다는 성인 이능력자도 다리에 힘부터 풀릴 상황인데, 그들은 주위를 한 번 훑지도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한 명에게 꽂혀있었다. 시선 끝의 사내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니미럴, 구수한 욕설을 뱉었다.
마침내 신문지가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꿈 자리가 사납더라니." 그런 중얼거림이 들린 것도 같았다. 사내는 다리를 내리고 엉망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도 싹싹 넘기고, 젖힌 의자를 바로 하고 책상의 먼지까지 후후 불어내며 사람을 앞에 둔 채 한참 부산을 떨더니.
“어서 오십시오, 손님분들!”
깍지 낀 손등에 턱을 올리며 순식간에 빙글빙글 웃었다. 영업용 멘트가 속사포로 쏟아졌다.
“먼지부터 묵은 때 찌든 때, 머리카락, 손 모가지, 혓바닥. 더러운 건 무엇이든 깨끗이 청소해드리는 녹림 청소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보아하니….”
집 나간 고양이 찾으러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흐리는 말끝이 의뭉스럽다. 극단적인 태도 변화가 섬찟한지 머리를 양 옆으로 동그랗게 묶은 여학생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출구를 확인했다. 무기를 든 장정 셋이 듬성듬성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개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남학생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교복을 입었음에도 속에 현명한 지도자가 들어앉은 듯한 묘한 기품이 흘렀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알고 있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
긍정도 부정도 않고 여전히 뜻모를 미소만 내걸은 사내에게, 명찰에 진백천이라 적혀있는 학생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 사질, 어디 있습니까?"
녹림왕.
째깍, 째깍…. 초시계 소리가 길었다. 고요한 탐색 끝에 사내의 얇은 입매가 천천히 열렸다.
"그게 누군데?"
"…엥?"
**
"나는 녹림왕이 아닙니다."
쪼르륵. 연식 있어보이는 깊은 자기 컵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따라졌다.
뜨거운 물이 차오를수록 컵 표면에 붉은 꽃잎이 떠오르는 신기한 잔이었는데 어린 손님들은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차의 냄새가 무척 고약하기도 했고, 이 험하기로 소문난 거리에서 정체모를 차라니 마시라고 주는 게 아니었으며 애초에 음식이 눈에 들어오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엔 채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반면 사내, 임소병은 그들 사정이야 관심없다는 듯 느긋했다. 백천과 유이설, 윤종과 조걸, 당소소, 그리고 혜연. 나잇대와 교복 모두 제각각인 학생 하나하나 앞에 다과를 밀어 준 그는 느른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조걸이 슬쩍 그릇에 손을 댔지만 윤종에게 손등을 얻어 맞았다.
"위풍당당하게 쳐들어온 것 치곤 겁이 많으신데."
그는 조걸의 그릇에서 김이 붙은 동그란 과자 하나를 빼 와작와작 씹어 보였다. 헛기침을 하는 윤종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판촉물 부채(‘피 한 방울 하나 안 남게 청소해드립니다!’) 하나를 집어 얼굴을 부치기 시작했다.
"여러분 같은 손님이 처음은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여럿 있으셨죠. 학교 교장 선생님, 목사, 대기업 회계사… 국대에 외국인도 있었고.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똑같더만요. 그래, 전생에 도사님이셨다고?"
백천이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모두 한 문파, 아니 한 맹의 일원이었습니다. 기억을 찾은 지 얼마되지는 않았으나 운 좋게 만날 수 있었고요. 믿기 힘들다면…."
"아니. 믿고 자시고."
촥. 임소병이 부채를 접으며 말을 끊었다.
"그래서요?"
"예?"
"뭘 하고 싶으신 건데?"
"…말했을텐데요. 제 사질을."
“찾아서 어쩔 거냐고.”
“예?”
"자, 제가 지금부터 진백천 학생이 할 말을 요약해보겠습니다."
임소병이 백천을 비롯한 학생무리를 죽 훑으며 숨을 길게 들이 마셨다.
“도사님으로 지냈던 오랜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 들었는데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내가 미친 줄 알았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 있더라. 그래서 기억 속 지인들을 미친듯이 찾았는데, 막상 찾으니 정신병자 취급을 받거나 기억이 있어도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이건 한 사람만 찾으면 금세 해결될 문제! 하지만 어떻게? 그래, 녹림왕! 그 자라면 어떻게든 해 주겠지. 그래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 이렇게 찾아왔다!”
“…….”
“…….”
“…….”
짝짝…짝. 조걸이 떨떠름히 박수쳤다. “염병.” 자리에서 일어나 손까지 휘저으며 열연을 펼치던 임소병이 털썩, 가죽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부채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모습에서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이 팍팍 풍겼다.
“그 녹림왕이라는 작자도 위통 꽤나 앓았겠습니다. 맹의 핵심이라는 작자들이 이렇게 체계가 없어서야.”
“아미타, 크흠. 어째 기억이 없어도 믿긴 하십니다….”
“혜연 학생이죠. 불자셨습니까? 묵주가 잘 어울리십니다 그려.”
“아, 아멘! 아멘!”
“신실한 하느님의 종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믿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아니죠. 단순히 제가."
탁. 싼티나는 부채가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녹림왕이 아니라는 것."
"……."
"그리고 여러분도 더는 도사님들이 아니라는 사실. 중요한 건 그겁니다. 그저 학생, 그 뿐 아닙니까?"
"학생도 사람을 찾을 순 있잖아요!"
"말 한 번 잘 하셨습니다 조걸 학생. 물론이죠. 거기다가 고작 십대에 이리 두각을 드러내는 이능력자들이라니, 솔직히 길드장으로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점수 따기 바빠야 정상입니다만!"
"그럼!"
"녹림은 미성년자 가입 금지거든요."
벌떡 일어난 조걸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아니 무슨 십년도 전에 없어진 조항을. 그것도….
“불법 길드잖아요.”
“불법 길드라서요.”
“불법 길드가 나이를 따져요?”
“끙, 이게 사정이 있습니다. 불법치곤 솔직히 덩치가 좀 크거든요. 지하 길드 다섯 손가락에 드니까… 윗분들 보기에 이게 참 눈엣가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미성년자한테 떳떳치 못한 일을 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이거 한번 싹 쓸고 민심 사로잡아서 이번 선거 출마해봐?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
“정치욕이 든단 말입니다 정치욕이! 이건 사과박스로 달랠 수준이 아니거든.”
중원에서야 산전수전 다 겪었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햇병아리에 불과한 미래의 꿈나무들이 쏟아지는 사회의 더러움에 할말을 잃었다. 그 때 임소병이 쾅! 탁자에 구둣발을 올렸다. "그러니까!" 그리고 귀를 후비며 영혼없이 대꾸했다.
"사람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입니다. 나참 공무원 나리들이 영장 내밀때나 하는 말을 교복입은 학생한테 하네. 나라꼴 잘 돌아간다."
나라꼴 망치는 주범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슬쩍 문가에 선 보초에게 턱짓했다.
"사람 찾는 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만 끌어들이지 않는다면야. 솔직히 70억 인구에서 하나 찾아내면 그게 기적이긴한데 글로벌 시대 아닙니까. 틱톡, 유튜브. 뭐 많잖아요? 저는 어차피 기억도 없어 별 도움 안 될 겁니다. 얘들아, 손님 가신."
"있어."
첫눈같은 목소리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임소병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 근원지를 찾았다. 투명한 눈동자의 미인이 그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읊었다.
“‘맹의 핵심이라는 작자들이 이렇게 체계가 없어서야.’”
“…….”
“있잖아요, 기억.”
거짓말쟁이. 유이설이 비난했다. 끼익…. 보초가 문을 열다말고 팔을 떨었다.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삼 도쯤 내려간 것 같았다.
“유이설 도장은.”
대치를 깬 쪽은 임소병이었다. 침묵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역시 무각주엔 아깝습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감찰부주가 낫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제 권유를 받아들이셨다면 적극 밀어드렸을 텐데요."
"아군을 의심하면 싸울 수 없어요."
"그때도 똑같이 말씀하셨죠. 아쉽습니다. 군사전 일이 절반은 줄었을텐데."
"아니 잠깐, 잠깐만요."
조걸이 벌떡 일어나 와, 와! 하며 손끝으로 임소병을 가리켰다. 걸아, 무례하게. 윤종이 꾸짖었지만 정작 손가락질 당하는 당사자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소파에 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두 손으로 차나 후후 불어 마시는 작태에 조걸이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까? 녹림왕 시절을?"
"예 뭐."
"들키니까 바로 긍정하는 것 봐!"
"딱히 숨긴 적은 없습니다? 나는 녹림왕이 아니라고 했지, 기억이 안 난다곤…."
"'저는 어차피 기억도 없어 별 도움 안 될 겁니다.'"
"유이설 도장, 저한테 화 났습니까?"
요 입이 방정이지, 방정이야…. 끌끌 혀를 차던 임소병이 과장스레 양 팔을 들었다.
“예, 거짓말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속일 수 있을 줄 알았죠. 하지만 제가 속였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완전 다르죠! 기억이 있으면 협조해주실 거잖아요?”
“제가 왜요?”
“응?”
조걸이 눈을 깜빡였다. 임소병은 벽걸이 시계를 한 번 보더니 급격히 다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대충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여지껏 상황을 지켜보던 백천이 끼어들었다.
“찾을 생각이 없으시군요.”
“오?”
“불법이라곤 하나 대형 길드로서 법과 정치에 얽매이는 입장이니 쓸데없이 시선을 끌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고, 이득이 없으니까.”
“오호?”
“무엇보다 방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일 겁니다.”
“사숙, 아니 형. 방법이 없다뇨! 형네 아버지가 그랬다면서요. 녹림은 눈은 전국에 뻗어있다고. 그러니 괜찮을거라고 형이."
"그랬지. 하지만 여기 사람들을 직접 보고 알았다."
“뭐를요?”
“눈은 있지만 입이 없군요.”
조걸의 고개가 홱 윤종에게로 돌아갔다. 윤종이 쓰게 웃었다.
"전과자, 폭력배, 빚쟁이, 사기꾼. 어딜가나 있지만 누구도 말을 섞지 않는 자들이지.”
“그건… 태도를 바꾸면 어떻게든.”
“행실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를 숨길 수 없는 시대야. 그리고 어떤 정보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은 사람을 감지하는 법이거든. 너도 자주 말하지 않느냐? 저 녀석 느낌이 쎄했다고.”
“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시대를 거듭하며 발달한 사람의 본능이다. 막을 수 없어. 중요한 건 그들이 한차례 죄를 지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지. 그리고….”
“어떤 피눈물나는 사연이 있었든 한낱 범죄자에 불과한 새끼들이 고개를 쉽게 쳐들고 다닐 수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 라는 거겠죠.”
임소병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 범죄자의 우두머리 되는 양반치고 신랄한 투였다. 윤종은 조금 못마땅한 기색으로 백천에게 고갤 돌렸다.
"전국에 포진한 녹림의 눈은 대부분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자들이니까. 정보를 소유하되 통제하지는 못하는 게 지금 녹림의 한계로군요. 맞습니까, 사… 선배?”
“그래. 외부를 견제하기엔 충분하지만 그 이상의 영향력은 없다. 불특정 다수를 수색해야하는 우리 목적과 맞지 않아.”
“이야, 정확합니다. 정확해요! 역시 전직 장문인들. 척하면 착이로군요?”
짝짝짝. 임소병이 과장스레 박수를 치더니 금세 눈썹을 늘어뜨리며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보십쇼. 이게 장사하는 입장에서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아십니까? 장사는 홍보가 반인데 별 이상한 인간들이 자꾸 꼬이니 그것도 맘껏 못 하지. 그 양반 찾아달라 하나같이 눈물로 호소를 하는데 정작 단서는 없어! 막말로 어느 나라에 어느 얼굴로 떨어졌을지, 태어는 났을지도 모르는구만 일개 양아치 조직이 그걸 무슨 수로 찾습니까? 지금이 개방이니 녹림이니 하는 시대도 아니고만."
"기술이⋯."
"아 기술은 저기 민중의 지팡이들이 쓰시는 게 기술이고! 얼굴에 칼자국난 놈들한테 CCTV나 보여 주겠냐? 이건 구역 장사입니다 구역 장사! 로컬 비즈니스!"
임소병이 책상을 탕탕 치자 몇 명이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고 반짝 눈을 빛낸 임소병이 쯧 혀를 찼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
"여기는 중원이 아닙니다. 강호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고요. 뭐, 이능력이니 뭐니 하는 걸 보면 아주 없던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우린 더 이상 무인이 아닌 그저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는 과거, 기억은 기억."
타악. 임소병이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여러분은 그저 여러분입니다. 살던대로 사십쇼. 아쉬우면 사람 모아 적당히 친목이나 다지면서. 교복입고 이런 데 올 게 아니라 학생의 본분인 공부나⋯."
"답을 계속 피하시는군요."
백천이 말을 끊었다. 임소병의 얇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녹림왕, 처음부터 다시 묻겠습니다. 내 사질이 있는 곳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녹림왕이 아니⋯."
"당신이 아니라 녹림왕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백천은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과거는 과거, 기억은 기억. 그 시절을 어떻게 취급할지는 오로지 본인의 선택이니 저는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미 수많은 옛 사형제와 그렇게 작별하고 온 참인데 녹림왕 정도야 뭐."
"…저기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죄송한데 솔직히 안 궁금합니다. 소소 아버님이나 야수길드장 사이에서나 좀 화제되지 않을까요? 그쪽 심경의 변화라거나 우릴 모른 척 돌려 보내려던 이유같은 건 놀라울 만치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녹림왕이란 전생의 이름값이 아깝다는 생각 정돈 드는군요."
"보자보자 하니까?"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볼 일은 없으니까요.”
죽은 자는 죽은 자끼리. 백천이 읊는 순리가 무겁게 사무실을 울렸다. "나 화산의 23대 장문인 백천은 죽은 자에게 물으러 왔습니다." 정명한 눈빛이 푸르게 빛난다.
"내 사질의 유언에 살다 죽은 천우맹의 책사에게."
잠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임소병의 반응은 미미했다. 백천의 연설에 감화된 것인지 기분이 상한 것인지, 표정만으로는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턱을 괘고 건너편 벽에 걸린 작은 거울 하나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톡, 톡…. 마른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를 느릿하게 두드리는 소리만 느릿하게 울리다가.
톡.
"살다살다⋯."
불쾌함이 깃든 웃음소리가 흘렀다.
"죽은 놈 주둥아리 취급은 또 처음이네. 뒈진 놈은 말이 없는 법인데."
"녹림왕은 죽어도 입만 뜰 사람이었으니 괜찮습니다."
"쯧쯧쯧, 그 성질머리는 어째 죽지도 않소? 모릅니다."
바뀐 말투로 돌아온 대답에 이번엔 백천마저 눈을 크게 떴다.
"모른다고요?"
"예."
“단서조차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게 말이⋯."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았지요?"
백천의 입이 다물렸다. 임소병은 강냉이 과자를 한 움큼 집어 한알씩 입에 던져 넣으며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백천 도장과 이설 도장은 8… 아니, 6할. 윤종도장 5할. 그리고 나머지는 4할? 아닌 척 허세로 포장하고 있지만 아직 멧돼지력이 다 돌아오지 않았더구만. 고작 책상 좀 친 걸로 놀라니 말이야. 내가 아는 소소 도장이라면 되려 내 손바닥을 펜으로 찍었을 겁니다. 사형제 문제에서는 물불 가리는 법을 모르니까."
유이설의 소매를 붙잡은 소소가 입매를 굳혔다. 고작 열다섯 남짓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혼란을 읽어낸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아직 잘 모르는거죠. 그 '사형'의 얼굴이, 백천 도장의 '사질' 이름이. 그저 누군가가 있었다… 그 정도려나. 이쪽도 같은 사정입니다. 어쩌면 더 나쁘죠. 종일 붙어살던 댁들도 그런데 내 기억이 온전할 리 있나."
"그건 무슨 말입니까?"
"이런 겁니다."
임소병이 손에 쥔 강냉이를 테이블에 공깃돌처럼 흩뿌렸다.
"소소 도장의 기억이 가장 적죠? 다음은 혜연 스님. 다른 사형제들이야 뭐 비슷비슷할 거고. 결국 만난 시간 순입니다. 인생에 그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을수록 정보가 많아진다는 뜻이죠. 비록 얼굴이나 목소리 뭐 하나 기억나지 않고 나누었던 말이나 행동, 당시의 상황 따위가 어렴풋할 뿐이지만요. 마치…."
“꿈처럼.”
“…그렇습니다.”
한 박자 늦게 돌아온 긍정에 소소의 다갈색 눈동자가 임소병을 보았다. 하지만 임소병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과자를 몇 그룹으로 나누었다.
"청자배가 그 자와 함께 보낸 시간이 이만큼, 백자 배가 이만큼이라고 친다면 저는 요오만큼입니다."
"그렇게 적습니까?"
"예에. 저도 놀랐긴 한데 따지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만난 당시는 끽해야 일주일, 반란 진압을 지나 장강조약 맺을 때 잠깐 보고 댁들이 냅다 봉문을 때리셨죠. 그 이후로는 다 비슷하지. 공평하게 굴려지다가 다 같이 사패련 잡고 마교 잡고 천마잡고⋯."
임소병이 툭 말했다.
"죽었잖습니까. 그 양반이."
그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백천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완전히 낯선 사람을 보는 시선.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나는 녹림왕이 아니래도."
"⋯⋯."
"모릅니다. 정말로. 사건의 대략적인 줄기만 오래된 지식처럼 기억나는 상황에서 아무리 날 달달 볶아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생각도 없습니다. 애초에 내가 쓸데 없는 기억 떠올리지 않으려고 댁들부터 피했고만."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고요?"
"예. 귀찮지 않습니까. 전생의 기억이란거."
"그 애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까?"
"왜 다들 그 소리를 하지?"
임소병이 정말로 이해가 안된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상식적으로 뒷일 다 떠넘기고 혼자 죽어버린 짝사랑을 다시 보고 싶어하나?"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세간은 그런 걸 똥차라고 합니다? 어려서 모르시는건지, 아직 정파 도사 시절의 순수함이 남아 있는 건지. 뭐, 그만큼 전생의 내가 계산기 못 두드리는 멍청한 놈이었다는 뜻이겠지만. 어쨌든 간에 결론은 같습니다."
임소병이 손에 쥔 부채를 우두둑 구겼다. 그리고 그 잔해를 보란 듯이 떨구며 구두로 짓밟았다.
"기억이든 사람이든, 찾을 생각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의뢰는 거절입니다."
**
“괜찮으십니까?”
“음?”
좁은 1인 소파에 가로로 몸을 구겨넣은 이상한 자세로 쉬고 있던 임소병이 눈을 반짝 떴다. 역시 안 주무셨군. 저래서야 주무실 생각이 있긴 한건지. 주인의 머리가 여물기도 전부터 충복으로 그를 모셔온 번충이지만 이럴 때마다 당최 알수가 없었다. 제 주인을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 보듯 하며 번충은 말린 과일이 든 지퍼백을 내밀었다.
“드십쇼.”
“왠 살구.”
“오늘 사람 데리러 출장 다녀왔지 않습니까.”
“아아… 산에 사는 놈이랬지. 뭐 지역 특산품이야? 믿을 만해? 알고 지내던 사이랬나?”
배려없이 몰아치는 질문. 녹림의 많은 놈들이 이 짓을 한 번 당하면 길드장이 또라이가 아닐까 의심한다. 번충은 차례차례 답했다.
“직접 말렸답니다. 피로회복에 좋다니까 매일 다섯개씩 드십쇼. 사람은 몰라도 일단 칼은 잘 씁니다. 죽은 셋 땜빵 정돈 쳐요. 저번에 골목 청소할 때 손 빌렸는데 손속도 적당했습니다. 일단 인력 구할때까지만으로 얘기 봤지만 내일 면접에서 직접 결정하시고요.”
곁을 오래 지킨 그는 임소병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은연 중 압박해 진실을 뱉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 측근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만큼 사람 하나를 뽑을 때도 신중을 기한다는 뜻이겠지. 아니, 어쩌면 사람이기에 그럴지도.
“아아, 그놈….”
임소병의 길드 관리는 병적으로 완벽했으니까.
말단에도 미치지 못하는, 스쳐 지나간 사람까지 금세 떠올리는 두목을 볼 때마다 도대체 저 머리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싶어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두번째 삶이라고 되는 일이면 수많은 녹림도가 지금 이러고 있겠는가? 컴퓨터는 몰라도 도서관 하나 쯤은 들어 있으리라.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천장을 보던 임소병이 금세 축 늘어지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뽑아. 그만하면 적당하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마당에.”
“예. 드십쇼.”
“입맛 없어…. 나중에 비타민이나.”
“매일 거르시지 않습니까. 알약은 잘 못 삼키시고 가루약은 싫다 하시고 음료엔 포도당 타고. 그게 다 액상과당.”
“에이 진짜.”
임소병이 성질을 부리며 지퍼백을 채가 부하의 얼굴에 던졌다. 아무렇지 않게 받은 번충이 다섯개를 직접 꺼내 건네자 궁시렁대며 받아 결국 한 조각씩 우물댄다. 색소 옅은 입술 아래 보랏빛이 돌고 있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알아.”
“제가 떠날 때보다 더요.”
“안다니까.”
“수락하는 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최대한 넌지시 덧붙였으나 맹렬한 코웃음이 돌아왔다.
“내 병명을 알긴 하지?”
“이능력 거부반응….”
“그래. 능력자의 면역 질환이야. 절맥이 아니라.”
임소병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설령 그 양반을 찾는다고 치자. 이 세상에나 당사자에게나 재앙같은 가정이지만 다시 태어났다고 치자고. 그래서? 거진 이백년 묵은 유물이나 다름없는 양반이, 아직 힘의 근원이 밝혀지지도 않은 이능력과 내 신체의 충돌 원인을 간파할 수 있냐? 학계에서도 쩔쩔 매고 있는데 무슨 수로. 이제 무인도 아닐진데 혼원단을 만들수나 있을까? 혼원단이 이걸 고쳐준다는 보장은?”
“하지만 형님이라면 어떻게든….”
“번충아.”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그를 부르자, 번충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너까지 그러지 마라.”
“죄송합니다.”
“네가 그렇게 불러달라 해서 부르고는 있지만 네 이름은 석이야.”
에퉤퉤. 신 것을 씹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임소병이 말했다.
“실존했는지도 모를 몇 천 년 전의 기억 때문에 삶이 흔들린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한 사람 때문에. 우정이니 가족애니, 별 낭만적이고 숭고한 이름은 죄 갖다 붙이고 있지만 저건 그냥 미친 거야. 자기 자신을 빼앗긴 거라고. 아까 걔들 봤지?”
“…호칭을 헷갈리더군요.”
형이었다가 사숙이었다가 선배였다가 아주 정신없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복귀해 문지기로 서 있던 번충은 모든 대화를 지켜보았는데…… 솔직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드럽고 거지같아도 자신답게 사는 게 삶이다. 난 병들었을지언정 미치진 않았어. 그 한심한 녹림왕이랑은 달라.”
“예에….”
“아니 근데!”
마지막 살구를 앞니로 깨작대던 임소병이 왈칵 얼굴을 구겼다.
“생각할수록 빡치네! 누가 누굴 보고 싶어해? 왜 다들 내가 그 인간을 당연히 찾아 헤맬거라 철썩같이 믿는 거냐고 당할 꼴이 빤한데! 대가리 총 맞았나? 내가 뭐가 아쉬워서!”
“지, 진정하십쇼.”
“이 바닥에서 딱 5년만 굴러봐라! 꼴랑 전생체험에 쩔쩔매는 그 따위 나약함은 싹 다 없어지니까. 애초에 나는! 새 사람 찾았다 이거야!”
“예, 예. 알죠.”
이럴 땐 녹림왕이랑 판박이신데. 번충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렇게 날뛰다가 또 쓰러진다. 저혈압이면서 다혈질인 상사를 모신다는 건 고달픈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씩씩대던 임소병은 제 풀에 지쳤는지 소파에 풀썩 몸을 묻었다. 뚱하게 튀어나온 주둥이 길이가 몹시 불안했다.
“왜 연락이 없지.”
역시나. 번충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약을 보낼 때가 됐는데.”
“아직 여분이 남아 있잖습니까. 기다려 보시죠.”
“누가 그걸 몰라? 늘 기한보다 일찍 연락하는데 영 감감 무소식이잖아. 일부러 거주지도 바꾸지 않았구만.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원체 변덕이 심한 사람이잖아요. 재료 수급에 문제가 생겼을수도 있고.”
“재료 수급에 문제가 있어서 연락을 피한다?”
“그럴 수도….”
“그 성격에?”
“…….”
“대금을 뜯었으면 더 뜯어갔지.”
임소병이 손등으로 뺨을 누르며 킥킥 웃었다. 번충이 묘한 표정을 했다.
8개월 전부터다.
임소병은 전생의 인연을 만나고 나면 기분이 몹시 저조해졌다. 오늘처럼 어떻게든 잘 구슬러 보낸다지만 이후 피로가 훅 오르는지 넋을 놓거나 느닷없이 잠에 빠지기 일수였다. 원래도 세상만사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사는 인간이 그렇게 굴 때마다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귀신에 씌일 것 같달까. 그리고 ‘꿈’을 꾸고 나면….
‘반드시 피를 보셨지.’
지금 이 자리에 번충만 있는 이유였다. 괜히 평소처럼 얼쩡대며 심기를 거슬렀다가 한쪽 귀가 잘려나간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조직 힐러를 불러 곧바로 붙여 주었다지만… 중동 내전 지역을 구르다 온 기자 출신의 힐러는 그게 더 악질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달라졌다. 그 사람이 나타나고서부터.
“즐거워 보이십니다.”
“즐겁다마다.”
“이름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름도 모르는 놈이 나한테 약을 팔고 있잖아.”
임소병이 노래하듯 읊었다.
“심부름꾼, 편지, 소포, 전광판, 지하철 보관함…. 이쪽은 틈만나면 본부 위치를 바꿔대는데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어떤 방식으로든 물건을 전해와. 내 눈이 어디에 포진해 있는지 그때그때 파악한다… 이건 정보의 흐름을 읽는다는 뜻이거든. 신기하지? 이런 놈이 왜 숨어 사는 걸까? 살인자인가?"
"대인기피증 일지도요. 많잖습니까, 이능력자들 중에."
"너무 대범해. 그런 심약한 놈이 지하 길드장 개인 사무소로 정체불명의 약 상자를 보내는 간 큰 짓을 할 리가. 그때 속는 셈 치고 먹어보길 천만 다행이지.”
“저는 솔직히 지금도 반댑니다.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약이잖습니까. 마약이라거나 장기복용하면 독이 될 수도….”
“그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약이 날 지금까지 살려뒀잖아. 불만이냐? 왜, 네가 길드장 할래?”
“왜, 왜 또 말이 그렇게 됩니까?”
“그럼 내놔.”
임소병이 돌연 허공에 손바닥을 쫙 펼쳤다. 순간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번충이 눈을 껌뻑거리다가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그 앞에서 재촉하듯 하얀 손바닥이 한번 오므렸다 펼쳐졌다. 결국 번충은 품에서 종이 봉투를 꺼내 올려두었다. 흠. 뜯어진 구석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임소병이 페이퍼 커터로 봉투를 뜯었다. 유려한 붓글씨를 만족스럽게 매만지고 내용을 읊는다.
“14번지 7길 사랑방.”
“두목 단골 찻집 아닙니까?”
“맞아.”
“우연일까요?”
“그럴리가. 내일 점심 스케줄 빼야겠다. 번충아.”
“예.”
“다음엔 손모가지다.”
“예….”
“나가 봐.”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방을 나선다. 소리 없이 문을 닫고 긴 숨을 내쉬었다. 손목이라, 저 약을 끊게 한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만.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옛날부터 그랬으니. 그때 툭, 누군가의 팔꿈치가 옆구리를 찔렀다. 빨간 머리통. 나곡이다. 그 뒤로 식구들이 숨 죽여 늘어서 있었다. 이마에 붕대를 동여맨 나곡이 제 당근색 머리 위로 양 검지를 뿔처럼 세웠다. 화나셨어? 번충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검지가 관자놀이 께에서 빙빙 돌았다. 번충이 아리송한 얼굴을 하자 나곡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또 정신 나갔.’
철썩! 곽민이 나곡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끄아아아아아…. 다친 곳을 얻어맞은 나곡이 지렁이처럼 소리없이 몸을 꼬았다. 번충은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어 착잡해졌다. 그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곽민이 평소보다 여유없이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가?’
나곡을 비롯한 식구, 한때 녹림십영이라 불렸던 자들의 고개가 한꺼번에 쏠렸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시선에서 번충은 불현듯 주인의 말을 떠올리고 만다.
- 실존했는지도 모를 몇 천 년 전의 기억 때문에 삶이 흔들린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한 사람 때문에.
그는 꾸깃꾸깃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곡을 비롯한 놈들이 썰물처럼 전투적으로 통로를 빠져나갔다. 머리 아프다는 듯 한차례 이마를 짚은 곽민이 멀뚱히 서 있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턱짓했다. 숙소 문을 넘자 짜장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맨손으로 탕수육을 집어먹던 들개 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여!
- 철신장!
빨리 와!
춘장이 가득 묻은 못난 얼굴들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 곽민이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지.” 번충은 안다. 이게 저 꽉 막힌 사내의 염려라는 것을. 번충을 대신해 등에 석궁 다섯대를 맞았을 적에도 꼭 이렇게 느릿느릿 어깨를 쳤다.
“…그래.”
그가 우둔해서일까?
길드장의 말은 절대적이다. 적어도 녹림에서는 그랬다. 번충은 녹림의 가장 큰 방패. 두목의 모든 말에 복종한다. 하지만 전생부터 못 배운 놈이라 그런가, 역시 전부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과거는 과거, 기억은 기억….
- 너까지 그러지 마라.
하지만 두목.
내버려두면 알아서 죽어갔을 우리를. 그 숟한 기억에도 여전히 쓰레기같이 살아온 우리를.
당신은 다시 모았잖습니까.
**
“이거 뭡니까?”
“흐음. 녹림왕 단골 찻집이라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낡았군. 여기 벽이 깨진 것 같은데 벽지로 가렸나? 도배를 새로 해야겠어.”
“크하하하! 술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풀 물만 마시던 기생 오라비가 이런 좋은 곳을 알고 많이 컸어. 주인장! 이거 병으로 안 파나?”
“뭡니까 이거?”
고지식한 진녹색 슈트를 빼 입고 지팡이 끝에 달린 뱀머리로 찻집 구석구석을 두드리며 평가하는 미중년과, 트레이닝 차림으로 카페 바닥에 퍼질러 앉아 밤에만 판매하는 주류를 쌓아 놓고 낮술을 걸치는 사내. 늘 앉는 테라스 자리에서 늘 주문하는 차를 홀짝이며 낯선 만남을 기대하던 임소병에게 들이닥친 두 재앙의 이름은 당군악과 맹소요, 그 별명은….
“일 하나 합세.”
야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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