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ve Butterflies in My Stomach - 가슴이 두근거리다, 긴장되다
서당에 호출 당해 홀로 훈장을 마주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임소병은 마른 침을 삼켰다. 겉으로야 태연하다지만 속으로는 땀을 비오듯 쏟아내는 중이었다. 여느때와 다를 것 없이 천우맹의 회담을 마치고, 모두가 자리를 뜨는데 혼자 남아 일거리며 회의 기록을 갈무리하느라 분주한 와중 그의 위로 왠 쪽지가 떨어졌다.
[미시. 여기서. 조용히.]
너무도 잘 아는 필체라는 게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필체의 주인은 그보다 일찍 이곳에 도착해, 반 시진 내내 그를 세워놓고 눈싸움을 벌이는 중이셨다. 저 기세를 오롯이 받아내며 부동자세로 서 있자니 빈혈이 다 도는 기분이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못 버티진 않을 것인데, 몸상태가 정말 말이 아니군….
다행히 고약한 심보가 풀린 것인지 그 짧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인지,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이 귀밑머리를 타고 떨어지기 전에 팔짱을 낀 청명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불길한 징조인데.
"할 말 없냐?"
이상한 질문. 그들은 천우맹에서 가장 대화가 많지만, 보고와 상의를 제하면 다른 나눌 말이 거의 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은 오늘 회의에서 모두 마쳤다. 이 녀석이 또 뭘 바라시는 걸까? 빠르게 머리를 굴린 임소병은 결론을 냈다.
"그 장부는 빼돌린 게 아니라 천우맹 비자금입니다!"
이럴 땐 이실직고부터!
"말고."
"말고요? 아, 창고에 그건 독약이 아니라 양념입니다. 도가 음식은 산적놈들 입맛에 영 삼삼해서."
"말고!"
"…이건 진짜 놀라운데. 흙에 묻어둔 술단지는 대체 어떻게 찾으셨답니까? 말코가 아니라 개코신가?"
"아니 미친놈이 켕기는 게 뭐가 이렇게 많아!"
청명이 혈압이 오른 노인네처럼 고개를 뒤로 꺾으며 삿대질과 함께 버럭 소리쳤다.
"다 말고 이 새끼야, 너 얼굴 꼴이 왜 그러냐고!"
임소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 야심한 밤에 사람 불러다 인신공격할 시간 있으면 발이나 닦고 주무쇼!"
"꼬리 빼지 마! 누굴 속여 먹으려고. 왜 비루 먹은 쥐새끼 시절로 돌아갔어? 절맥 도졌냐? 어디서 혼… 자소단 남은 거 줏어다 갉아먹어서 탈 나놓고 숨기려 드는 거 아니냐고! 이 썩을 놈의 쥐새끼가 감히 내… 대 화산파의 영단을!"
"아니 미친, 안 먹었다고! 뭘 주고 말하든가!"
임소병은 필사적으로 붕붕 고개를 저었으나 안타깝게도 효과는 없었다. 의심을 한 톨도 거두지 않은 청명은 말할수록 점점 눈깔을 뒤집더니, 급기야 아수라처럼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임소병은 창백하게 질려 고양이 앞에 쥐처럼 슬금슬금 뒤로 몰렸다. 마침내 등뼈가 벽에 툭 닿는 순간, 싸아아⋯ 피 식는 느낌이 선연했다. 빠져나갈 작은 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그가 부채를 숨겨둔 쪽의 손가락 하나를 까딱한 순간이었다.
콰아앙!
청명이 손바닥이 임소병의 머리 바로 옆의 벽을 뚫었다. 히익…. 고작 한 팔을 뻗는 것으로 임소병을 완벽하게 가둔 청명이 눈을 희번떡댔다.
"그럼."
"사, 살려."
"설명을 해."
"그러니까 뭘, 대체 뭘요!"
"태생부터 허약해 빠진 놈이 의원을 멀리 했을 리는 없고."
무미건조한 어투였다. 멈칫한 임소병의 얼굴에 가득 떠올랐던 억울한 기색이 차차 지워졌다.
"영단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병이면 진작 장문인께 매달렸겠지. 재료와 제작법이야 저번에 파악했을 거고, 핵심인 나는 장문인의 명이면 두말없이 움직일 테니까."
달달 떨면서도 바라바락 대들던 목소리 역시 쏙 들어갔다. 임소병은 슬쩍 눈을 굴려 청명의 무표정을 확인하더니,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 제대로 노하셨군.
"그저 평범한."
"잔병치레라고 하진 마라. 네놈 몸 상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네놈만한 절대고수가 고뿔 걸린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야."
"……."
"즉, 별것도 아닌 일로 쓸데없는 개고생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파 새끼야. 내 말이 틀리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얇은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린 것을 확인한 청명은 이럴 것을 예상한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바싹 붙어, 남은 손을 임소병의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임소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놈에게서 머리를 빼면 남는 건 내공밖에 없지."
"도장."
"나는 단전을 봉인한 적이 손에 꼽는 사람이야. 봉인할 바엔 파해야지. 전쟁 깨나 겪어본 놈이니 알고 있지? 강호에서 약하면 가장 먼저 죽는 게 책사다. 나는 약한 책사는 필요없어."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못 했잖아."
"시간을 좀 주시면."
"내가 지금 시간 안에 해결 못 봐서 이런다고 생각하냐?"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에 눈빛을 바꾼 임소병이 쏘아붙였다.
"그럼 아닙니까?"
"허."
"제 몸 상태가 책사로서의 결정에 지장이 갈까봐 걱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감읍하긴 하나 이 녹림왕, 절맥을 앓을 때도 녹림을 지켜낸 몸입니다. 제 한 몸 건사는 물론이고,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임소병은 배짱 하나만큼은 어디서 꿀리지 않는 종자였고, 청명이 자신의 이런 점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게 꽃히는 시선에 물러서지 않고 팽팽히 맞섰다.
"파하실거면 파하시지요. 그것이 도장의 뜻이고 녹림을 지키는 길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단지 막 마교와의 전면전에 들어가는 천우맹인데, 강한 책사는 죽이고 약한 책사는 버리면 길이나 찾을런지 걱정이군요."
"뭘 착각하나 본데."
하지만 예상과 달리 청명은 그를 비웃지도, 협박하지도 않았다.
낮은 목소리가 싸늘하게 이어졌다.
"지금 넌 천우맹의 책사를 방패로 삼을 자격이 없어. 아니, 입에 담을 자격도 없지."
"…고작 몸 관리에 실패한 것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물로 만들 만큼의 큰 잘못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패도에 뜻이 있으셨습니까? 놀랍지는 않군요."
"도발은 상대를 봐 가면서 쓰라고 했을텐데."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줄 알았죠. 무위와 지략 모두 부족하여 죄송하게 됐습니다."
"전혀 감을 못 잡는군. 둘 다 틀려. 네 잘못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거다."
"절대고수가 턱없이 부족한 맹입니다. 불안감 조성을 막으려 한 것이 잘못입니까."
"네가 그렇게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쓴 천우맹의 자격을 잊은거냐?"
"자격이라면 이미 증명했습니다!"
"천우맹은!"
청명이 으르렁댔다.
"대가 없이 서로를 도와주는 친우다. 이 멍청한 사파 새끼야."
물 흐르듯 이어지던 임소병의 대꾸가 일순 멈추었다. 그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에, 울컥 화가 치밀어오른 청명은 지금껏 참아 왔던 말을 쏟아냈다.
"네놈이 틈만 나면 살려달라 불러 재끼는 맹주님, 제법 가까워진 당가주님. 하다못해 야수궁주님이나 네놈 눈에 못 미더운 만큼 어리숙하고 착해빠진 놈들이 여기 천지다. 누구에게라도 말했어야지. 도와달라고. 평소처럼 징징대고 시끄럽게 종알종알 묻지도 않은 사파 사정 늘어놓으며 바짓가랑이 붙들고 매달렸어야지. 화산신룡의 발이라도 핥겠다던 놈은 어디가고 왜, 이제 와 없던 자존심이라도 생겼어?"
"전……."
"내게 도와달라고 말했어야지, 녹림왕."
실로 오랜만에 듣는 제 칭호가 비수같아서, 녹림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친우로 여기지 않는 놈은 나도 친우로 대할 생각 없어."
"친우… 말입니까."
"아직까지는. 그 꼴이면 이제 됐어. 시간은 충분히 줬다. 그러니까 내 인내심이 다 해 네놈 단전을 부수기 전에, 우리가 한낱 거래 상대로 돌아가 내가 녹림을 찍어 눌러야 하기 전에."
말해.
어디가 아파.
실로 폭력적인 다정이었다. 임소병은 숨이 막힌 사람처럼 한참 미동이 없었다. 청명은 기다렸다. 타고나기를 인내심이 짧은 청명이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른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잠을 못 자고."
"어."
"속이 울렁거립니다."
"그래."
"눈 앞이 시도때도 없이 반짝거리고."
"또."
"뱃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툭. 녹림왕의 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속에서 증상을 조합하며 가장 오래된 기억까지 긁어모으던 청명은 생전 처음 듣는 마지막 증상에 몇 가지를 물어보려다가 우뚝 멈췄다.
임소병이 죄인처럼 고개를 깊이 떨구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라고요?"
덫에 걸린 산짐승처럼 꽉 막힌 목소리. 떨리는 손끝이 창백하고, 목덜미가 붉다. 청명은 그 순간 무언가를 직감했다.
"누구에게, 무슨 염치로 도움을 청하라는 겁니까?"
"너……."
"지금 이 감정이 가장 당황스럽고 창피한 건 나인데."
실소와 냉소가 뒤섞여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음성이 청명의 귀를 파고 들었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게 바로 당신인데.
"도움 따위 바란 적도 없습니다……."
청명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은 차게 식어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힘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그 단순한 동작에 청명은 손도 쓰지 못 하고 뒤로 밀려났다. 후두둑, 임소병의 머리 바로 옆 벽면에서 산산조각난 파편이 떨어지며 부서지는 소음을 냈다. 그것이 꼭 사람에게서 나는 소리 같았다.
임소병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관을 주워들었다. 구겨진 것을 억지로 펴 머리에 쓰고 옷가짐을 바로 해 고개를 들자 그림처럼 단정한 표정이 드러났다. 틈 없이 분명한 목소리로, 녹림왕이 말했다.
"해결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씀드렸듯 시간만 주시면 됩니다. 별 일 아닙니다, 도장. 그냥 면상이 좀 보기 흉해져서 그렇지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제가 누구입니까? 화산검협의 오른팔이자 천우맹의 책사 아니겠습니까?"
임소병이 씨익 웃었다.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원점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황해서도 아니고, 건넬 수 있는 모든 말이 잔혹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친우기 때문이다.
청명이 임소병에게 믿으라 했기에, 임소병은 그의 앞에서 한번 무너졌다. 이번엔 청명이 임소병을 믿어야 한다. 임소병이 믿으라고 했으므로.
그들이 천우맹이기 때문이다.
"그럼 쉬십시오."
"야, 잠깐…!"
화들짝 놀란 청명이 바람처럼 처소를 빠져 나가는 임소병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임소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쳐냈다. 붙잡은 소매 끝이 북 뜯기며 부채 몇 개가 와르르 쏟아졌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청명은 애매하게 허공을 뻗은 제 팔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뒷머리를 긁었다.
"저걸 잡아서 어쩌겠다고."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 다 튀어나왔다. 제 아무리 청명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긴, 저 수완 좋은 놈이 혼자 끙끙 앓는다면 그건 그럴 만한 문제일텐데.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기껏 늘려놓은 수명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집히는 걸 어쩌라고?
이 정도면 밤 잠 설치는 것도 이해가 갈 노릇이다. 당장 청명도 잠은 다 잔 것 같으니까. 사내 새끼, 그것도 예쁜 점이라곤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사파 새끼라 그런가 속이 미식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눈 앞이 막막한 나머지 별이 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청명은 고개를 젓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임소병이 그의 손을 어찌나 강하게 쳐냈는지, 난과 나비가 그려진 부채가 활짝 펼쳐진 채 바닥을 굴러다녀 온 사방에 흰 나비가 내려 앉은 것 같았다. 그 한 가운데 청명은 오래된 매화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상황이 천천히, 아주 가볍고 연약한 것의 날개짓처럼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했다. 손끝의 떨림, 푹 숙인 고개, 붉어진 목덜미, 겁에 질린 목소리. 그리고…….
- 뱃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 한심하고 초라한 고백이.
"아-…."
천장으로 시선을 올리며, 골치 아픈 문제를 만난 노인처럼 한바탕 침음성을 낸 청명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거칠게 쑤석이다가 아예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빌어먹을 나비가 손과 발에 걸려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집어 던졌더니, 벽에 튕겨 아예 배 위에 나뒹굴었다. 청명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환장하겠네."
뱃속에 나비라니, 이거 기분 엄청 나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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