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기억환생패러디
청명은 씽크대 밑 수납장 앞에 쭈그려 앉아 고민에 빠졌다. 새벽 세 시. 라면 하나 얼큰하게 끓여 먹기 딱 좋을 시간.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바닥이 시커먼 양은 냄비가 아니라 식칼과 쇠국자, 넓대대한 나무 주걱, 후라이팬이 일렬로 걸려 있는 수납장 측면이었다.
똑똑.
바로 저것 때문이다.
이 새벽에 청명의 숙면을 방해한 간 큰 놈. 저기요. 안에 계세요? 따위의 말 한마디 없이 이 혹한의 추위에 47분째 남의 단칸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수상한 새끼. 참다못한 청명이 친절하게 먼저 용건을 물었으나 - 뒈지기 싫으면 꺼져!- 배짱 싸움이라도 해보자는 건지, 흔들림 없이 똑같은 박자로 문을 두드려와 살살 미칠 것 같았다. 좋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도 대접해주는 게 화산의 제자가 지켜야 할 도리.
뭐어가 가하장 손맛이이 좋을까아
청명은 흥얼거리며 후라이팬을 들었다가 나무 국자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굵은 소금을 펴발랐다. 저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어떻게 알아. -그가 무려 47분이나 인내한 이유였다…- 나무 주걱을 휙휙 휘두르고, 난방을 거의 틀지 않은 채로 자느라 뻐근한 목을 양 옆으로 우득우득 꺾으며 그가 문고리를 쥐었다. 똑… 벌컥! 마지막 노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히자 시린 바람이 품에 뛰어들듯 청명의 앞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복도엔 마르고 창백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귀신 같았다. 얼어죽은 귀신. 청명은 귀신에게 말을 걸었다.
“집 주소 바뀌었는데.”
“아… 어쩐지.”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가르쳐준적도 없는 주소를 찾아와 한시간 내도록 보고 있었을 상대는 그가 이사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듯 얇은 눈을 느릿느릿 껌뻑였다. 눈밑은 움푹 꺼져 퀭했고 진녹색 체크무늬 머플러에 반쯤 가려진 뺨이 몇달 만에 홀쭉했다. 청명은 문틀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고동색 코트, 주머니에 총 없고. 검정 구두, 핏자국 없고. 어디서 패싸움하다가 파이프 후려맞고 회광반조로 기어온 게 아니라면.
“쯧.”
청명은 손에 든 것을 대충 현관 안으로 던져넣고 두 발자국 나아갔다. 그리고 얼어붙은 뺨 근처로 비스듬히 손을 올려-
짜악!
살얼음을 깨듯 날카로운 소음이 복도를 찢었다.
얻어맞은 놈은 두어번 눈을 끔뻑이더니 슥, 여전히 무감한 얼굴을 돌렸다. 가면이라도 쓴 것 같네. 반대지만. 청명은 따끔따끔한 손바닥을 털다가, 너무 얼어붙어 맞은 티도 안 나는 뺨을 느른히 문지르는 놈의 멱살을 쭉 잡아 당겼다. 방금 얻어맞아 놓고 맥없이 끌려오는 꼴이 기가 찼다. 코 끝이 부딪힌다.
킁.
술냄새….
독한 알콜 향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청명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남자가 입을 벌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턱. 입술이 손바닥에 막혔다.
“취했냐?”
“아뇨.”
‘아뇨?’가 아니라 ‘아뇨’. 완전히 갔구만. 따귀 맞기 무섭게 빽 튀어나와야 할 우는 소리도 없고. 청명은 이놈의 주정을 안다. 얌전해지고, 솔직해지고.
“도장….”
이기적으로 굴지.
그를 멋대로 끌어안는 전 애인의 차가운 품 속에서, 청명은 우중충한 회색 하늘을 멀거니 올려 보며 한숨 쉬었다. 씨, 더럽게 말랐네. 이게 안는 거야 안겨 오는 거야.
“놔.”
“추워요…….”
“어쩌라고.”
“아프면 부르라면서….”
얼마나 처 마셨길래 말에 두서가 하나도 없어. 추운 거랑 아픈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이놈 체질에 당장 내일 독감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이긴 한데…. 익숙한 향수 내음을 살짝 들이 마시며, 청명이 대꾸했다. “■■■.” 끌어 당긴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청명은 머리 아픈 소리 끝에 다시 불렀다.
“임소병.”
지금 임소병의 이름은 임소병이 아니다.
몸 담은 환경이나 외양, 체질같은 것들이 비슷하긴 했으나 명백히 다른 사람이었다. 기억을 찾는다고 모든 걸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 쉬운 세상이던가. 드넓고 둥글어진 천하에서 삶은 더 복잡해졌고 옛 인연들은 분주했으며…. 이 세상에 '임소병'을 부를 사람은 청명 하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게 문제였을 것이다.
“다 지난 얘기잖아.”
“…….”
“우리 끝났어. 개싸움도 그런 개싸움이 없었는데.”
“하지만 도장이….”
“청명 씨.”
“네. 도장이….”
이 새끼가. 한창 교제하던 중에도 둘만 남았을 때만 허락하던 호칭-임소병은 이걸 애칭이라 불렀다-을 지적했지만 임소병은 청명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도장이 그러셨잖아요.
“도장은 성격이 나빠서, 꺼지라 그러면 진짜 꺼지라고. 꺼졌다가 금방 다시 오면 죽는 거니까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만 만약 그 사이에 아프면…. ”
청명은 그제서야 제가 했던 말을 가물가물 떠올렸다. 대판 싸우고 연락두절. 서로 뻐팅겼더니 삼주만에 온 새벽 전화. 청명 님이시죠. 응급실입니다. 환자 긴급 연락처로 등록 되어있어 연락드렸... 오는 길에 죄 뜯어진 슬리퍼로 싸대기를 때리며 일갈했던가. 아프면 싸우고 지랄이고 일단 불러. 모르는 데서 숨 꼴딱꼴딱 넘어가지 말고. 허락없이 뒈지면 뒈지는 거야. 알았어?
찾아갈 테니까.
“부르려고 했는데, 받지 않아서. 공중전화를 찾다가 동전이 없어서… 그래서 계속 걷다가….”
“…….”
“저 아파요.”
임소병이 청명의 목에 푹 얼굴을 묻었다. 춥고 아픈데 어찌할 줄을 모르겠어. 초라한 말이 뿌연 입김으로 흩어져 청명의 시야에서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청명은 조용히, 단호하게 가슴팍을 밀어냈다. 순순히 떨어진 놈의 표정을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 아주 옛날, 그의 손에 검이 있고 임소병의 손에 부채가 있었을 무렵. 중상을 입어 잘 걷지도 못 하는 청명을 부축하겠다고 저도 상처입은 몸을 붙이는 것을 밀어내며
- 치워.
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한심하기는….”
대상이 누군지 내뱉는 이도 몰라 갈 곳 잃은 비난을 읊조리며 멱살을 잡아내렸다. 임소병은 뜻을 이해 못 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부딪히기 전에 입을 벌렸다. 습관이란 게 무섭지. 혀가 엉키며 금세 질척한 소리를 냈다. 역시나. 얼굴만 만졌을 땐 -따귀도 만졌다고 할 수 있다면- 몰랐는데 살이 뜨끈뜨끈했다. 청명은 금세 농밀해지는 혀를 잘근 씹곤 말했다.
“너 열 있다.”
“네.”
“알면서 이 상태로 브랜디를 쳐 드셨어.”
“단 술 싫어하시니까….”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에휴. 주정뱅이 상대로 입씨름은 이길 재간이 없다. 보통 내가 그 주정뱅이 역할이니 잘 알지. “에취.” 다 큰 놈이 코까지 훌쩍이자 청명은 결국 욕을 궁시렁대며 불청객을 안으로 들였다. 진눈깨비를 한시간 내도록 처맞으니 물에 빠진 쥐가 따로 없었다. 코트를 벗기고 낡아 빠진 목도리를 풀고, 근데 이 새낀 5년 전에 준 걸 언제까지 쓸 셈이지. 명품 위에 벼룩시장에서 산 걸 두르고 싶나. 아무튼 목 조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가며 훌훌 벗겨내 술과 담배 냄새로 찌든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데 놈이 계속 움찔거렸다. 뭔가 싶어 팔뚝을 잡아 문질러 보자 파드득 끙끙. 청명은 그를 욕실로 뻥 처넣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옷 위로 냅다 뿌렸다.
“읏. 아프, 따가워. 이거 싫어요.”
“가만 못 있어?! 너 이거 동상이야.”
임소병은 말 안 듣는 쥐새끼마냥 물줄기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했다. 죽이고 싶다…. 저놈 집에 눌러 살던 몇달 전까진 어쩌다 취해 오면 문답무용 욕조에 처 박았는데 -도장 이거 물고문 어펖푸- 가난이 죄지 죄야. 그는 수압 약한 샤워기를 높이 걸어두고 놈을 잡기 시작했다. 머리 적시고 잡아오고, 단추 몇 개 풀고 잡아오고, 벨트 풀고 잡아오고…
“헤헤.”
“…….”
정신 차리니 둘 다 쫄딱 젖어 있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면 되려 재가 되는구나. 허허. 허탈한 청명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소병은 청명의 물에 젖어 끝이 굽슬굽슬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킥킥거리기나 했다. 니가 애냐? 얼라야? 관심을 괴롭힘으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새끼냐고! 청명은 벌컥 성질을 부리며 이 나잇값 못 하는 놈이 도망칠 수 없게 단숨에 벽으로 밀어붙여, 팔로 마른 갈비뼈 위를 봐주지않고 짓눌렀다. 임소병은 핀에 꽂힌 나비처럼 퍼득거렸다. 진작 이럴 것을. 쥐새끼는 몰아 세워야 하는 법인데.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청명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윽….”
그러나 금세 멈칫했다. …부러졌나? 이곳이 강호가 아니고, 그를 포함한 모두가 무인이 아니란 사실을 일주일에 5일 정도 까먹고 사는 청명이다. 임소병의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 정도야 분질러 먹은 전적이 수두룩했다. 청명은 그의 맨 허리며 가슴팍을 바쁘게 더듬어댔다. 총알 자국은 옛날 거고, 칼자국은 아물었네. 뼈도 잘 붙어 있… 뭐야, 말짱하잖아.
“하여간 엄살…은…….”
말꼬리가 흐려졌다. 시선이 마주친 탓이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임소병의 새카만 눈동자는 코 앞에서 응시해도 보는 쪽이 비치지 않아 마치 늪 같았다. 삼킬 줄만 아는 탁한 늪. 설령 물이 썩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살이 투명히 비치는 셔츠 속을 침범한 손이 남의 것처럼 어색했다. 낭창한 허리에 아슬아슬 걸쳐진 정장 바지도 뒤늦게 알아챈다. 똑…똑… 평소엔 뒤로 넘겨 짧게 친 듯 보이나 사실 더벅머리에 가까운 머리칼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과히 크게 들렸다. 까맣고 탁한 한 쌍의 늪이 넘실넘실 다가와….
쪽.
“…….”
“…….”
쪽.
“…….”
“…….”
쏴아아…….
타액과 물줄기가 함께 들어와 입을 크게 열 수 없었다. 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감질난다는 듯 비좁은 틈으로 욕심껏 파고 들어 입 안이 혀로 꽉 찼다. 기어코 목젖까지 건드리자 꿀꺽, 하룻밤 과오를 삼키고 만다. 물줄기가 후회까지 씻어줄까. 마르고 나면 너는 또 추워할텐데. 나는 널 따뜻하게 해 줄 수 없는 사람인데.
함께 있어도 춥다고 네가 그랬잖아.
타인과 절박하게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더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청명은 너무 오래 살았고 세상은 너무 평화로웠고… 그는 이제서야 피곤했다. 두번의 죽음 끝에 허락된 권태는 줄곧 기다려온 것처럼 반가웠으며 청명은 이 모든 것이 기쁘지도 애달프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자… 깨달았다. 낙화한 꽃은 어디로 가는가.
이건 찻잎을 말리는 과정인거야.
생을 건너 고백하는 임소병에게 청명은 그렇게 말했다. 적당한 햇빛, 적당한 바람. 피 튀기는 고난도 눈물 나는 행복도 없는 평범한 삶으로 정성스레 말려 훗날 차를 우린 사람이 향기롭게 웃기 위한 시간. 그래. 너희를 위한 시간이다. 하나 둘 기억을 찾고 한바탕 울다 웃고 다시 하나 둘 각자의 자리로 떠나가, 수년마다 또 하나 둘씩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겠지. 그때가 내 마지막 개화.
그러니 이번에도 네가 가질 수 있는 건 싸늘한 죽음 뿐이야.
바스라지는 숨결 뿐이야. 나는 정말 다 경고했다고. 그런데도 걸어 들어온 건 너였잖아. 나보고 차에 조예 없는 인간이 할 법한 말이라며 코웃음친 건 너였다니까. 영 시고 짜고 맛이 이상한 요즘 요리를 들이밀지 않나, 깊은 맛이라곤 하나도 없는 술을 사오고. 싫다는 사람 끌고 하늘을 나는 고철덩이에 겁도 없이 태우더니 세상에 못 본 게 이렇게 많다며 쉰 소리를 해댄 것도 모자라 갑자기 재개발이니 뭐니 잘만 지내던 집에서 사람을 납치한 것도 너였어. 놀고 먹지만 말고 일 도와달라 귀찮게 들러붙던 것도 너였다고. 그만하고 싶다길래 보내줬는데 그럼 손 덥혀줄 다른 사람을 찾아야지, 왜 다시 이 추운 곳에 기어들어와. 착각이라도 할 것 같잖아. 네가 나랑 같이 춥겠다고….
우리 끌어안고 얼어버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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