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기억환생패러디 + 이능력 세계관
진정하자. 내 트라우마가 아니다.
‘따지자면 전직장이지.’
임소병은 경련하려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시큰둥히 비꼬았다.
“형식절차 다 건너 뛰고 사업제안? 사천당문도 끝났군요. 길드장은 차남에게 물려주길 바랍니다. 그쪽이 쉬워서.”
“난 아직 현역이네. 다 아는 사람들끼리 무슨 체면인가? 제안서 쓸 시간도 아까운 마당에.”
“이보세요. 전 댁들을 모릅니다.”
“어이, 녹림왕. 천년 만인데 한 잔 받지!”
“녹림왕이 아니….”
“맹소, 행실을 바로하게.”
“그나마 제정신인 사람이 있군요.”
“시간 없네. 한시간 안에 남궁황한테 대금 땡기러 가야 해. 이놈이 자꾸 러시아 시차를 들먹이면서 미적거린단 말이야.”
“…….”
흩날리는 멘탈 속에서 네 야근 향이 느껴진거야. 임소병이 고개를 젖혀 푸른 하늘을 한 번 보았다. 아마 한동안 못 볼 것이다…. 그는 눈의 땀을 빠르게 삼키고 허리를 세웠다.
“바쁩니다. 용건만 하시죠.”
“자네의 포기가 빠른 점을 좋아하네. 자, 여기.”
털썩. 당군악이 품 속에서 서류를 꺼내 던졌다. 임소병은 표지부터 목차까지 다섯장을 한 번에 집어 넘겼다.
“제안서 쓸 시간도 없다더니?”
“이걸 제안서라고 부르면 안 되지. 3차 교열도 못 마쳤고 용지도 수준 이하인데.”
“미친 당가….”
“본론은 32 페이지부터네. 천천히….”
“지금 보고 있습니다.”
“…시력은 괜찮나?”
“괜찮겠습니까?”
“어이, 나도 끼워 달라고!”
맹소가 기어코 병 세 개를 품에 끼고 쿵쿵 걸어오다 천장 장식에 머리를 박았다. 우지끈. 가볍게 부서지는 찬장과 어색하게 웃는 맹소를 동시에 돌아본 두 남자가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여전하군.”
“여전하시네요.”
재회는 이것으로 다였다.
6분 뒤, 임소병이 손가락 한뼘 두께의 제안서를 책상에 던졌다. 그는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게.”
임소병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눈을 부릅떴다.
“‘작전명- 족제비’ 이거 누가 지었습니까?!”
“진동룡.”
“그놈의 진가!”
에에잇! 저주받은 작명센스는 왜 시대와 함께 저물지도 않는가!
“아무튼… 이해했습니다. 남궁이 자금, 당가가 명분, 야수궁이 수단. 녹림이 지령을 내리고 화산이 움직인다는 거로군요.”
“익숙한 우리 방식이지.”
우리라. 임소병은 지적 대신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확실히 가능할지도요. 아니, 가능합니다. 거대 길드 네곳이 연합하고 우리 애들 수까지 더해진다면야, 사막에서 바늘 찾기 쯤 식은 죽 먹기지. 하지만 길드장께서 직접 움직이시다니 의외입니다? 소소 학생이 제일 망설이는 줄 알았는데.”
제일 제정신이고.
“내 딸? 아,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지 알겠군. 하지만 틀렸네. 그런 부탁을 할 애가 아니지. 좀 해도 좋으련만.”
“호오, 그럼 맹주님?”
“교장직 은퇴하고 귀농하신 분이 여기서 왜 나오나?”
“하하.”
임소병이 의자에 느른히 등을 기대며 글자처럼 웃었다.
“대형 길드장 셋이 서로 거들떠도 안 본 채로 최소한의 교류만 유지하며 삼십년 가까이 잘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추억팔이할 마음이 생겼다고? 누구의 입김도 없이?”
“우리 둘은 자주 만났을 수도 있지. 자네만 쏙 빼고.”
“아내랑 3년 내내 아프리카 횡단한 길드장은 입 다무시고.”
“하하하!”
맹소가 대뜸 사자처럼 웃었다. 맙소사. 고막을 얻어맞는 것 같군. 임소병은 띵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해야 ‘물건’을 받고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홍차를 저으며 여러 방법을 떠올리는데 맹소가 말했다. 자네.
“역시 우릴 전부 보고 있었구만?”
달칵. 찻잔을 휘젓는 스푼이 멈췄다.
“……당연한 말씀을? 전 녹림의 수장입니다. 전국에 눈과 귀가.”
“해외까지? 미안하지만 아직 그 정돈 아니지.”
맹소가 아무렇지 않게 급소를 찔렀다. 입을 꾹 다문 임소병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다국어 하는 인재가 녹림에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면 애초에 녹림이 아니지. 하하하.” 맹소는 모른 척 아예 크게 한 술 더 떴다. 임소병의 찻물이 흔들리자 줄곧 커피잔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당군악이 “맹소.”하며 그를 말렸다. 근엄한 목소리에 깃든 웃음기가 더 열받았다.
“별로 상관없잖나. 보고 있었든 아니든 그를 찾으려면 녹림이 필요해. 이미 끝난 얘기일텐데?”
“그랬지. 하지만 쥐 꽁무니가 보이면 일단 잡고 보는 게 사자 심리라. 심지어 이건 잡아달라는 것 같은데?”
“그만.”
“알았네, 알았어.”
한 마디 한 마디에 정보가 녹아있고 그것으로 치고 빠진다. 순식간에 합을 주고 받는 설전을 관람하며 임소병은 불쾌한 낯을 했다.
‘편하군.’
이 자리가 불편하지 않다. 익숙하다. 그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수 없이 본 광경이지. 정마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도 세 사람은 얼굴 마주치지 않는 날이 더 드물었으니까. 문파 재건, 양민 구휼, 잔당 처리, 어지러운 틈을 타 삿된 마음을 품는 맹의 불순분자를 솎아내는 일…. 회의실은 불 꺼질 틈이 없었고 질릴 정도로 언쟁하면서 각자 맡은 역할 역시 크게 바뀌었다.
길을 제시하던 임소병은 결정을, 방관하는 척 상황을 관찰하고 중재해오던 맹소는 핵심을 짚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던 당군악이 중재했다. 이 모든 걸 은연 중 전부 해오던 사람이 부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들끼리 바뀌어야 했고 서로를 잘 알면 알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결국 익숙해졌다. 셋 중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그들은 꽤 친해졌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
이래서 만나기 싫었던 건데.
“솔직히 말해보지.”
당군악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임소병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에게 우리가 움직이는 이유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나. 값만 확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억을 준대도 안 합니다. 시기가 나빠요. 얼마 안 있으면 선거철인건 아시죠? 쥐 죽은 듯 있어도 애들이 떼거지로 쓸려 나가는 시국입니다. 손해가 압도적으로 커요.”
“그건 정의 구현….”
“나한텐 인력 부족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가만히 있어도 인재가 쏟아지는 정식 길드는 모르시겠죠! 하루라도 일 더 배운 놈이 절실한데 교도소에 뺏길소냐?”
쾅!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 친 임소병이 슬그머니 저린 손을 주무르자 줄곧 쏘아붙이기만 하던 맹소가 슬픈 소 같은 눈으로 그를 안쓰러이 봤다.
“…지원 좀 해줄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쪽 길드원이라면 우리 애들하고 싸움만 빚을 것 같습니다.”
“끙. 맞는 말이야….”
“당가의 지원이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허구한 날 치고 받으니 사무실이 남아나질 않아 허리가 휩니다요.”
“하하, 고작 보수 인력으로 되겠나? 정말 필요한 건 의원일텐데. 고급 인력을 싸게 줄 순 없지."
커피잔을 기울이며 지나가듯 하는 말에 임소병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절맥 가진 녹림왕을 아는 자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오늘따라 많이 찌르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임소병은 기분 나쁜 기색이라곤 하나 없이 오히려 목을 앞으로 쑥 빼며 빙글빙글 웃었다.
“뭐 얼마나 좋은 걸 판돈으로 올리려고 이러실까?”
“이제야 좀 흥미가 생겼군. 부채네.”
“부채요? 에잉, 그거야 당장 제 사무소에도 넘쳐나는….”
“자네가 쓰던.”
임소병의 웃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일주일 뒤, 런던에서 경매가 열리네.”
런던. 제안서에 적혀있던 수색 시작지였다. 왜 국내가 아니라 영국인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구만. 끌어들이려고 작정을 하셨군.
“재벌, 졸부, 괴짜 수집가, 현금세탁이 목적인 범죄조직까지 한데 모이는 행사지. 그 규모는… 뭐, 자네가 더 잘 알겠고.”
“모르는 일입니다요.”
임소병이 능청을 떨며 당시를 회상했다. 부지 하나를 통째로 빌려 건물을 올리던데. 뒷배가 누군진 몰라도 돈 쓰는 폼이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나야 외화만 벌면 그만이지만.'
“이번에 당가가 시공 협력을 맡았네. 분실을 대비해 경매품 목록도 공식으로 전달받았지. 거기 익숙한 게 있지 뭔가. 남들 눈에야 골동품이겠지만….”
단순 감별 능력 하나로 국내 최고 무기 길드를 이룬 사천당가의 길드장이 외알안경테를 문지르며 단언했다.
“그건 아티팩트였네. 자네만을 위한. 역대 가장 강한 녹림왕의 기운을 수백년 머금었으니 분신처럼 다룰 수 있을거야. 위력은 물론이고 사용자에게 줄 효과를 생각하면… 지금의 자네에겐 구명줄이나 다름없지. 이제 구미가 좀 당기는가?”
임소병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미 당가의 인부가 현장에 있다. 해외 소식이 느려 지금에야 알았으니 물건을 먼저 빼돌리긴 텄다. 약점을 쥐고 있는 숟한 인사의 초대장을 갈취해 합법적으로 경매에 참가한다 해도 남궁에 밀릴 터. 하지만 이 일에 참여하는 게 남궁황이 아니라면?
‘가능해.’
그 무대포가 움직일 수 있는 자산엔 한계가 있다. 권력은 이럴 때 쓰는 거지. 해외에 빼돌린 외화가 얼마나 되더라? 차명계좌와 미술품까지 동원하면 어떻게든… 임소병은 바쁘게 주판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 전에.
“부작용은?”
“봐야 알겠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물건은 뻔하지 않은가.”
“역시 그렇습니까….”
절대고수. 그 정도 수식어로는 모자란 경지에 올랐던 세 사람이다. 오검을 비롯한 무리도 마찬가지이나 기억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능력은 무와 궤가 다르지 않다.
시대를 거듭하며 세상에 떠도는 자연의 기가 형편없이 줄어들고 변형(임소병은 오염이라고 생각한다)되어 초식이 발현되는 형태가 달라진 것 뿐. 무술의 관점으로는 모든 것이 달라진 것과 마찬가지이나 근본은 같았다. 그러니 현상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귀신들린 부채라.”
“자기자신더러 귀신이라니 박한 평가군.”
“딱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임소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파 고수의 기운을 듬뿍 머금고 수백년 잠들어있던 철선이라니. 피는 조금 먹였던가? 손에 쥐자마자 주인을 집어 삼키려들게 분명했다. 겨우 쌓아둔 둑을 제 발로 무너뜨리는 꼴이다. 타지 유명한 극 속 옛 왕의 고루한 절규가 떠오른다. 죽느냐 사느냐. 자기자신으로서 죽느냐 다른 것이 되어 사느냐. 과거에, 그는 이미 선택을 내린 적이 있다.
임소병은 그 결과를 안다.
“결정했습니다.”
“그런가.”
드르륵. 당군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군.”
“이쪽도 유감입니다.”
“또 보길 바라지.”
“그건 좀 무서운데요.”
임소병이 농담처럼 건넨 거절에 당군악은 별말 않고 등을 돌렸다. 카페 주인에게 목례하고 명함을 건네주는 뒷모습에서 매화도 주민을 실어 나르던 가주의 모습이 보인다.
“…안 가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맹소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팔뚝 부럽네. 임소병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마른 팔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차가 식었다.
“언제는 마음에 드셨다는 것처럼?”
“지금보다는 그랬지. 쥐새끼야.”
“예, 여우 나리.”
“뭐가 그렇게 겁나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헛웃음을 임소병은 굳이 막지 않았다.
“여러분이 너무 겁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냥 죽겠다고?”
으르렁대는 맹소는 드물게 정말로 화가 난 듯 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던 패기는 어디갔느냐? 먼저 간 그 놈을 사흘밤낮 함께 욕하던 기억은 전부 잊었는가? 그 잘난 면상에 주먹이라도 한 방 날릴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지! 세월이…!”
억울하지도 않아!
맹소의 호통 소리에 주인이 멀리서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사람좋은 표정으로 턱짓하며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궁주께서는.”
“여전히 정이 많으십니다.”
“…….”
“걱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말고도 이미 신경쓸 곳이 많으실 텐데요.”
맹소는 얼마전에 손주를 봤다. 팔삭둥이였다. 임소병은 그 맹소가 사람 하나 때문에 서아프리카로 확장하던 모든 사업을 팽개치고 귀국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가주 역시 끝내 속내를 말하지 않았고.
그래, 셋은 꽤 친해졌다.
어느 정도 서로를 알았고 이전 생은 물론 지금도 제법 나이를 먹었다. 당군악과 맹소는 다시금 가정을 꾸려 자식을 봤다. 그들은 변했다. 세상이 바뀌기 전부터 조금씩. 그 자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찾는다 해도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까지 잘 깨닫고 있겠지.
그들은, 알고 있다.
무엇이 겁나냐고?
“확신이 없습니다.”
임소병은 찻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더니 휘저어 없애버렸다.
“아직, 확신이 없어서. 그래서 그래요.”
“…….”
“오검은 괜찮을 겁니다. 좀 과격하긴 해도 한 사람 한 사람 시대를 풍미하는 인물이지 않았습니까. 기억을 온전히 찾고 새로운 능력에 익숙해질수록 안정되겠죠. 지금은 과도기라 혼란을 겪는 것 뿐이니 두 분께서 잘 이끌어 주십시오. ”
“자네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시간이 없어 보이니 하는 말 아닌가.”
“그것도 타고난 팔자겠죠. 아니면 뭐, 새 사람으로 잊던가.”
“뭐?”
“아, 사장님. 드디어 오셨네. 이것 좀 새로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쌍화탕 있습니까? 아침부터 들들 볶였더니 속이 영…."
“웨딩 임패리얼 티에 쌍화탕 한 잔… 맞으십니까?”
“계란 노른자도 띄워주심 좋고.”
해괴한 조합의 주문을 적어내리던 주인이 아, 하며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고 보니 이걸 전해달라는 분이 있으셨습니다.”
“오!”
“뭐, 뭔가? 이 쪽지 뭔데? 녹, 아니 임소병! 자네 진짜 새 사람 만나나?”
“뭐라고!”
진작 간 줄 알았던 당군악이 어디선가 달려나와 매처럼 날렵한 손놀림으로 종이를 채갔다. 앗! 말릴 새도 없이 남의 쪽지를 펼친 둘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저, 전화번호.”
“어허 이 사람들이 진짜!”
임소병이 쪽지를 휙 빼앗았다.
“애 다섯에 손주까지 본 양반들이 왜 이러셔 점잖지 못하게! 저리들 가십쇼!”
임소병이 쉿쉿, 대단히 무례한 손짓으로 두 남자를 쫓았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쪽지에 향해 있다. 상한 구석이 없는지 꼼꼼히 살핀 뒤 주머니에 소중히 접어 넣는 모습에 둘은 무언가 커다란 배신을 목격한 표정을 했다.
“어, 어떻게 자네가.”
“어쩐지 이상하게 발을 뺀다 싶었는데.”
“사파 사파했더니 진짜 변심을….”
“죽여 버려야….”
“거 누가보면 그때 정이라도 한 번 통한 줄 알겠네.”
“미쳤는가?”
“사파 새끼 주제에 감히?”
“아 어쩌란 거지?”
임소병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중간이 잘려나간 필름같았다. 발단. 녹림왕이 총사를 연모했다. 멍청할 정도로. 그래서 혼인도 거부하고 양녀를 후계로 들여, 은퇴해서까지 천우맹의 군사로 남았다…라는 시시한 결말. 그 사이 자세한 내막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다. 틈만나면 꿈에 튀어나와 잠도 거의 안 자는걸. 덕분에 1년 365일이 수면 부족이지. 슬슬 한계긴 한데….
어쨌든 사람들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알 사람들은 다 알았던 게지. 녹림왕의 철저한 외사랑이었단 것 쯤은. 손을 잡아보기는 커녕 고백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그린듯이 비참한 외사랑.
그런데 정말이지, 알 만한 인간들이 하나같이.
“아니… 그러니까 뭡니까. 사파 새끼한테 떡 줄 생각은 없는데 딴 사람한테 가는 건 못 봐주겠다? 뭐 그런 겁니까?”
사람을 개 똥으로 아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세가 양반들이 꽉 막혀서는! 내가 새 사람 좀 만날 수도 있지! 차였는데! 죽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그러면 안 되지!”
“왜!”
“모른다!”
“당 가주, 이 미친사람 좀 끌어내십쇼!”
“동의하네.”
하하 개새끼들. 일말의 반가움이 싹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빡침이 채웠다. 당장 혈압 올라 죽더라도 이 새끼들한테 보란 듯 엿을 먹이고 죽겠다는 순수한 마음. 그는 의지로 가득 찼다!
“눈 똑바로 뜨고 잘 보십쇼.”
임소병이 삐뚜름히 웃으며 보란 듯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뚜르르….
“지금 제 새로운 스윗허니달링을 소개.”
신호음이 멎었다. 헉. 임소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결됐다. 진짜 연결됐어. 그제서야 상대의 이름이나 나이는 고사하고 성별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껏 몇 번 연락을 주고 받긴 했으나 모두 중간 사람이나 암호를 통해서였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는 성격상 대리가 받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 어떤 사람이지?
유려한 붓글씨. 전율이 돋을만큼 계획적인 일 처리. 어처구니 없는 담대함. 언제나 0.1g의 오차도 없던 환약. 삼킬 때마다 느껴지던, 마약이라곤 의심조차 할 수 없는 그 청량함…. 마른침을 삼킨 그는 저도 모르게 그려낸 흰 가운 차림의 안경 낀 연상 미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어떤 사람이라도 좋다. 외양이나 성격에 끌린 게 아니니까. 시시한 호감 따위가 아니야. 사람 자체를 향한 순수한 호기심이다! 그는 조심스레 스피커에 입을 갖다붙이며 목소리를 쥐어 짰다. 쿵쿵. 입술이 바싹 말랐다.
“여, 여보세….”
- 아 씹 뭐야.
뚝.
뚜… 뚜… 뚜…….
“…….”
“…….”
“…….”
셋은 물론 가게 주인마저 말을 잇지 못하는 적막 속 띠링, 문자음이 울렸다. 잠시 넋을 놓은 임소병이 화들짝 내용을 확인하려다 실수로 읽기 모드를 눌렀다. 최신 ai가 내용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읊어주었다.
- 왜 멋대로 전화질이야?
“…….”
띠링.
- 먼저 연락줄 때까지 연락하지 마. 하려면 건당 삼백.
띠링.
- 아 맞아, 약에 담비 털 필요함. 수백년 묵은 거. 알아서 구하시고 찾으면 연락. 한달 내로 연락없으면 뒈진 걸로 간주. 그럼.
“…….”
“…….”
“……취향 한 번 대쪽같.”
텁. 당군악이 맹소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임소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임소병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사람 만날걸세.”
“안 차였습니다.”
“인연이란 게 따로 있는 법이지….”
“안 차였다고.”
“그래, 사내가 이런 일로 울면 쓰나!”
“가세요. 수백년 묵은 담비털 구해주실 거 아니면 런던인지 어딘지로 꺼지십쇼 좀.”
“응? 무슨 말인가, 자네도 가야지.”
“네?”
임소병이 무슨 개소릴하냐는 듯 그들을 올려다봤다. 그들 역시 무슨 개소릴하냐는 듯 임소병을 쳐다봤다.
“저… 자네 약사인지 새 이거인지가 담비 털 필요하다며?”
“예 뭐….”
“그럼 가야지.”
“왜요?”
“…담비 털을 구해야 하니까?”
“요즘 경매에선 짐승 털도 팝니까? 한약방이야?”
세 사람이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지금 이 대화의 큰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뭔가를 깨달았는지 맹소가 크하하 맹렬한 웃음을 터뜨리며 제안서를 끌고 왔다. 그리고 몇 장을 휘리릭 넘겨 내밀었다. 황당한 작전명 아래, 임소병이 아무렇지 않게 넘긴 문구가 짧게 적혀 있었다.
1차 포획 대상 - 족제비
1차.
“…설마.”
“으하! 으하하하!”
당가주도 뭔가 깨달았는지 소매로 입을 가리더니, 곧 그가 입은 게 소매 넓은 장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예 고개를 돌렸다. 크흠. 킇. 크흠! 결국 맹소가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설명했다.
“그… 자네가 미리 거절해서 자세한 작전은 얘기하지 않았네만. 이 큰 별에서 사람 하나 찾으려면 아무래도, 큽. 사람보단 족제비 코가 낫잖나?”
“…….”
“이 친구를 먼저 찾으면 일이 아주 수월해질것 같더라고! 마침 내가 아프리카 횡단하는 김에 수소문해봤지. 동물 애호가가 참 많은 곳이라 금방 단서를 잡았네. 우리 작은 친구가 아직도 살아있더만. 단지 늙고 힘이 없어 잠에 빠진 모양이야. 왜, 영물을 두고 기승수니 페어리니 환장하며 사들이는 젊은 친구들 있잖나.”
“예….”
“그 손을 전전하는 것 같더라고. 태평하게 쿨쿨 자느라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덕분이라 할지 경매 목록에 올라왔네. 전설 속 백담비라나? 뺨 때리는 솜씨가 전설적이긴 하지. 킬킬킬.”
“그러니까 제안서가 말하는 족제비가….”
“백아.”
“…사람 말고?”
“최종적으론 사람일지도? 크, 진동룡이 이거. 다시 봤어. 작전명을 중의적으로 아주 잘 지었구만. 말장난으로 그 군사까지 속여먹을 줄이야.”
임소병이 시들시들 늘어졌다. 방금 전화로 공개망신을 당했을 때보다 비참해보였다. 맹소가 씩 웃으며 늘어진 어깨에 무거운 팔을 걸쳤다.
“자, 그럼 적어도 발 정도는 걸쳐주겠지?”
“…망할 족제비 새끼 찾으면 바로 탈주할 겁니다.”
“그래그래. 그런 걸로 치자고.”
“그렇게 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얘기가 끝났군.”
“아이고, 이제 다 웃으셨소?”
“누가 웃었다는 건지?”
“뭐 그것도 그런 걸로 치고.”
맹소가 양 팔에 여전히 솔직하지 못 한 옛 친구들을 하나씩 끼고 시원하게 외쳤다.
“어디 성질 더러운 족제비 놈들 찾으러 가보실까!”
**
- 동물을 아끼시는 줄 몰랐습니다.
평화로운 담소의 물꼬를 여는 듯한 한 마디였다. 백담비를 목에 두르고 맨 상체를 드러낸 남자가 숙였던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올린다. 뭐? 심술 가득한 목소리. 말 좀 걸었을 뿐인데 무슨 욕이라도 들었다는 반응이람. 꽁한 속내를 감추고 붕대를 마저 맨다. 등부터 어깨까지, 대각선으로 이를 쩍 벌린 상처를 없던 일인 양 덮는 데 공조하며 말을 잇는다.
- 요즘 들어 몸에서 떼어 두질 않으시니까요.
- 얘가 떨어지질 않는 거지.
- 그렇습니까? 특이하네요. 영물은 피를 싫어하는데.
- 엥? 진짜?
- 코를 막고 피하는 게 정상이죠. 피 냄새가 그칠 줄 모르는 몸은.
- 어째 널 더 싫어하는 것 같은데. 봐, 으르렁대는 거.
- 거야 주인 닮아서 사파 혐오증이… 아얏!
- 잘한다. 더 물어. 더. 아주 동강 내버려!
- 에잇, 좀 말려 보십시오! 붕대 다 흐르지 않습니까!
- 쯧쯧쯧 한심하긴.
사내가 팔을 수평으로 들어올리자 그를 물고 할퀴던 백담비가 쪼르르 팔을 타고 무릎으로 떨어져 위풍당당하게 선다. 나 잘했지? 하는 태도. 사내가 피식 웃으며 큼지막한 손바닥을 내밀자 긴 몸으로 아예 손목을 감고 털을 부벼댔다. 그가 탄식한다.
- 하이고. 짐승 팔자가 상 팔자라더니. 아양만 떨면 먹을 게 뚝뚝 수명이 펑펑. 좋겠다 너는.
- 하다하다 짐승을 부러워하네. 자존심도 없냐?
- 부러운 걸 어쩌겠어요? 아픈 와중에도 제 살 떼어 먹여주는 주인이면 자존심이고 뭐고 냅다 바닥 굴러야지. 나도 저런 주인 만나면 소원이 없겠, 아!
왠일로 잠자코 푸념을 참아주나 싶더니 결국 팍 붕대를 채간다. 매섭도록 째려보는 눈빛에 잽싸게 양손을 들고 헤헤 웃는다. 뺀질뺀질한 항복 표시가 웃기지도 않다는 듯, 돌아오는 건 세찬 코웃음이다.
- 야. 그냥 대놓고 말해. 피곤하게 돌려서 꼽 주지 말고.
- 말하면 들어는 주시고?
- 내력 회복 빠른 거 알잖아. 남는 거 준다는데 뭐가 문제냐?
- 아, 그렇군요? 이 임모가 미처 몰랐습니다.
자자. 살살 달래듯 주먹 쥔 손을 펴 붕대를 가져오고 다시 등을 보이게 한다. 한 바퀴, 두 바퀴를 더 둘러 매듭을 묶으며,
꾹….
- 그렇게 내력이 남아 돌아서.
상처 틈새를 손가락 끝으로 파고들듯 누른다. 등 근육에 꽉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순식간에 베어나온 핏물이 붕대를 적시자 옅은 봉선화 색을 머금은 제 손을 사내의 어깨 앞으로 보란 듯 내민다.
- 매일 밤 이렇게 제 손톱을 물들여 주십니까?
- 말 뽄새 진짜….
- 예. 사파 새끼랑 더럽게 말 섞기 싫으시면 적당히 해 두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살 놈입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당신이 사는 게.
- 모두를 살리는 길이지. 나도 알아.
상처로 우둘투둘한 손바닥이 작은 동물을 투박하게 문지른다. 백담비가 까만 좁쌀같은 눈으로 제 주인놈을 올려 보았다. 사람들이 녹림왕에게 가지는 잘못된 편견이 있는데, 산의 왕이니 동물과도 말이 잘 통하지 않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기대였다. 어처구니가 없지. 사를 단 인간이 금수와 교감하는 온정을 알 리가? 저 짐승이 괜히 그에게 이를 드러내는 게 아니다. 다만 한 평생 산에 산 만큼 영물에 해박한 것은 사실이라, 저 눈이 뭘 말하는지 정돈 알았다.
저 영리한 짐승은 주인이 주는 내력을 거부하고 있다.
- 다 알면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주지 마. 배불러. 괜찮아. 괜찮다니까.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들은 척도 않고 내력을 퍼붓는 건 다름 아닌 사람 쪽이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친듯이 신경에 거슬렸다. 말랑한 염려 따위가 아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 총사. 혹시….
- 아니야.
말을 자른 그가 선언한다. 난 안 죽어.
- 천마 새끼 모가지 자르기 전까지. 그때까진 죽어도 안 죽어, 못 죽어. 그 새끼 모가지 들고 내가 매, 천하제일인이다 십만대산 꼭대기에서 떵떵거릴거야. 그리고 화산의 제일가는 돌산말코로 살다가 보란듯이 등선할거다, 낄낄낄.
- 과연 역사에 길이 남겠군요….
- 그런데 얘는 그게 끝이 아니잖아.
담비가 짧은 귀를 쫑긋 세웠다. 사내가 그걸 양 손으로 쭉쭉 잡아 당기며 킬킬댄다. 전쟁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사라지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웃음이 헤퍼졌다. 그의 앞에서도.
…이건 불안이다.
- 우리에겐 세상의 끝나느니 마느니 하는 일이 얘한테는 스치는 찰나일거란 말이지. 그걸 이제 알았을 뿐이야. 오래오래 살겠지. 내가 짐작도 못할 만큼 까마득히 오래. 그때가 오면…… 혹시 모르니까.
그가 자신 몰래 무언가를 대비하고 있다는 불안.
그리고 그가 보는 먼 미래에. 그 미래를 안배하는 과정에.
- 야, 배 터지게 먹어둬라?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
“숨… 숨 막… 으으….”
“뭐라는 겁니까?”
“숨 막힌다는데?”
“그래서 이거 달아 줬잖아.”
“하나 더 달까?”
“야! 이 미친 인간들아!”
누가 비행기에서 산소호흡기를 세 개씩 둘러 사람 죽일 일 있어! 철썩철썩철썩철썩. 어머 언니이. 모를 수도 있죠 그럼요. 도와주려고 하신 거죠? 정말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이 개노답 아저씨는 제가 볼 테니 멍청이들 데리고 물 좀 가져와 주실래요? 저어기 복도 끝에 있어요. 기장 있는 곳, 네네.
다녀오세요오.
“……눈 뜨시죠?”
“아, 안압이.”
“에휴 별 꼴을 다.”
철썩. 찬 물에 적신 수건이 얼굴을 덮었다. 푸헉. 임소병이 수건을 덮은 채 우는 소리를 했다.
“좀 상냥하게 간호해주십시오…. 이륙하자마자 정신 잃은것도 서러운데.”
“내가 댁 전담 간호사도 아니고 왜.”
“서럽다 진짜.”
“방해꾼들 다시 불러줘?“
“감사합니다. 사례 하겠습니다.”
“말로만?”
“미슐랭 쓰리스타 정통 누들집 2인 풀코스 식사권.”
“허리 좀 더 눕혀드릴게요, 고객님.”
“…….”
의심할 여지 없이 당군악의 딸이다.
“근데 무슨 길드장이 이륙하자마자 기압 차로 뻗어요? 이능력자 맞아?”
“그게 저혈압이 좀….”
“저혈압만 문젠가? 몸 꼬라지가 아주 가관이더만. 영양부족 근육부족 수분부족 수면부족….”
“소, 소소 학생. 아픕니다. 팩트가 아파요.”
“산소 부족.”
소소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여전히 수건을 내리지 않는 길드장을 노려봤다. 얄미운 인간. 당소소는 환자에게 친절한 부류가 아니다. 아니지, 아니었다. ‘그녀’는 환자란 자고로 정신이 번쩍 들도록 쏘아붙여줘야 말을 듣는다고 믿었다. 그랬던 그녀치고도 지금 눈빛은 차가웠다.
“바람 속성 맞죠?”
“…능력에 눈 뜬지 얼마 안 되신 건 아는데, 그거 되게 민감한 질문입니다?”
“당신 그러다 죽어요.”
“에이, 사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아뇨. 쉽게 죽어요.”
“…저 그렇게 심각합니까? 전장에서 셀 수 없는 목숨을 살린 분 말이라 좀 무서운데요.”
“비꼬아서 쫓아낼 생각 마세요. 그 도발 나한테는 안 먹히니까.”
“어렵구만.”
“나는.”
당소소가 입을 한 번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해요.”
묘한 표현이다. 임소병이 수건 아래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정신 차리라고. 당신이, 녹림왕이 내게 그랬죠. 그 덕에 살아남아 수많은 죽음을 봤어요. 너무 이른 죽음이요. 그 중엔 당신도 있고요.”
“녹림왕은 꽤 장수했습니다만.”
“그 상태를 ‘산다’라고 부를 수 있나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소소 도장이 보기엔 어땠습니까?”
“시체 같았어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 소소학생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내가 죽은 사람 같습니까? 죽지 못 해 사는?
“…….”
임소병은 침묵으로 대답을 들었다는 듯 키들댔다.
“거보세요. 저는 당소소 도장의 현실성을 늘 높이 샀습니다. 관찰에 왜곡이 없죠.”
“비꼬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소소가 의심하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지만 진심이었다. 지금도 그 감상은 여전하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환경이 빚은 선택이라고, 본인이 특별히 대단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천성이었거든요. 인지력이 높고 판단이 빠르며 칼 같죠. 결정에 미련이 없으니 결단력 있고, 동시에 공감능력까지 갖추었어요. 당신은 보기 드문 인재였습니다. 다른 여인들이 다 소소 도장처럼 굴 수 있었다면 당가는 현존하지 않았을 걸요. 그 시절 당가는 포기와 체념의 합작이었거든. 아, 피해자니 가해자니 하는 얘기와는 별개로.”
“범죄자한테 그런 걸 기대하진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 생각에 동의하지도 공감하지도 않고요.”
“아야야.”
진짜 잘 패시네. 임소병이 낄낄댔다. 역시 께름칙하다. 당소소의 눈에 임소병은 녹림왕이나 길드장 따위가 아니라 다른 단어로 보였다.
미치광이….
사무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쪽이 높이 샀든 말든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 시절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그게 사실이고.”
“그렇죠, 그렇죠.”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이렇게 몸을 학대해요?”
“살려고 발악하고 있습니다만?”
“발악? 이게? 진짜 미쳤나봐. 이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학대에요. 자학이라고요. 내가 진짜 전부터 이 말 돌려주고 싶었는데, 정신 좀 차리세요!”
당소소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파앙-!
주르륵.
올려 묶은 머리 한 쪽이 흘러내렸다. 허공에서 폭발하듯 그녀를 밀어낸 역풍의 날카로운 압력이 머리끈까지 끊은 것이다. 툭.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임소병의 표정은….
…….
그녀는 침을 삼키며 벌렁거리는 심장도 함께 억누르려 애썼다. 차라리. 이럴 땐 그녀도 착각 속에 빠지고 싶었다. 무서울 것 없던 그때 그 여장부가 자신이라고 차라리 믿고 싶었다. 이설 언니를 거리낌없이 사고라 외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꿈을. 꿔서.”
“…….”
“무의식 중에,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능력이 신체와 충돌하는 것도, 틀렸어요. 아시잖아요.”
“당소소 학생.”
“당신이 스스로 호흡을 멈추고 있어요.”
소소는 어지럽게 번뜩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을 쏟아뱉었다.
“바람이. 바람이 당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바람을 거부해요. 밀어내요. 그 바람이 갈 곳이 없어져서, 그런데 너무 강해서.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뒤엉키다가 결국 불어나서. 이대로 가다간….”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소소 학생.”
휘이이…. 부드러운 흐름이 당소소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숨을 쉬세요.”
그녀는 그제서야 제 호흡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헉. 목을 부여 잡자 딱딱한 나뭇가지 같은 손이 그걸 금하듯 단호히 쥐어 내렸다. 대신 일정한 규칙성을 갖춘 바람이 그녀의 입과 코 주위를 둥글게 맴돌았다. 소소는 헐떡이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후우….”
“진정 됐습니까?”
“그, 네.”
“사천당가의 암존을 아십니까?”
“예?”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암존이라면… 유서에 적혀있었지. 분명 매화검존의.
“사형 친구요?”
“사형이라고 부르시는군요?”
당소소는 뱉어놓고 깜짝 놀랐다. 임소병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 자리로 돌아가 천장을 툭 쳐서 새 산소 마스크를 떨어 뜨렸다. 그걸 익숙하게 당소소의 머리에 씌우고 농도를 조절했다. 당소소는 얼떨떨하게 그걸 보고만 있었다. 환자 대접이라니. 그것도 저 사람한테. 역할이 뒤바뀐 거 아냐?
“세간엔 S급이라는 자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주장하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발굴되는 경우도 있고.”
“음, TV에서 봤어요.”
“다 짭입니다.”
“예?”
“짭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임소병이 우읏차, 굽혔던 허리를 쭉 피며 좌석 옆의 지렛대 비슷한 것을 발등으로 당기자 당소소의 의자가 휙 뒤로 넘어갔다. 으억!
이 인간 지금 복수하는 거지!
“그냥 적당히 봐줄만한 A급입니다. 대학으로 따지면 A0? A-? 애매하네. 아무튼 진짜 S급은요. 썩 좋은 게 아닙니다. 위험하고 불편해요. 미치기 딱 좋죠. 운 좋으면 그 직전에서 멈추고요. 댁 아버지처럼.”
“으에?”
“S급 감별사입니다.”
“아, 아빠가?”
“길드장의 외알안경, 써본 적 있습니까?”
“어릴 때 몇 번… 눈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평범한 돋보기인줄 알았어요. 뭐 대단한 아티팩트라도 돼요?”
“평범한 돋보기입니다.”
“뭐?”
“눈이 너무 좋거든요. 댁 아버지는.”
임소병이 주머니에서 진녹색 만년필을 하나 꺼냈다.
“제가 자주 쓰는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적당한 명품이겠거니 싶겠죠.”
“예….”
“잉크가 독입니다.”
“미친.”
“세공 뒤에는 카메라 렌즈가 있고 녹음도 되죠. 펜촉이 잘 갈아둔 단도 수준이라 여차할 땐 손등을 콱… 아니 이게 아니라. 요지는, 길드장께선 이걸 슥 보고 알아채 버리신단 겁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정보를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요. 얼마나 피곤합니까?”
임소병이 제 눈 옆을 톡톡 쳤다.
“그러니까 적당히 다운 그레이드 시켜줄 필요가 있는 거죠. 그분처럼 공공연하게 얼굴이 알려진 거물 S급이라면 상대에게 ‘너를 적대하지 않겠다’라는 표시도 되고. 솔직히 요즘같은 시대에 저 구식 안경을 왜 씁니까. 그냥 도수 높은 렌즈 끼고 말지. 그게 통수치기도 좋은데.”
사실 그 양반은 이걸 또 역으로 이용해먹는 거지만. 사람이 안심했을때 집어삼킨다니, 누가 독왕 아니랄까봐 하는 짓이 뱀이다 뱀. 물론 그걸 길드장이 소중해 어쩔 줄 모르는 열다섯 딸 앞에서 늘어놓을 만큼 간을 배 밖으로 내놓진 않았다.
무엇보다 본인이 열다섯살 당소소로 지내기로 결정 했으니까. 임소병은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뿐이다.
“S급들은 한 두가지, 많으면 서너 개까지 그런 불편함을 떠안고 삽니다. 간파시나 완전기억력, 초집중력. 그런 것들이요. 기감의 영구 증폭이라면 이해가 쉬울까요. 상황에 따라 능력이 될 수도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 본인만의 컨트롤 방식을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렵겠네요….”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소소 학생 얘기니까요.”
“예?”
“축하합니다. S급이십니다. 힐러 계열 최연소군요. 당가에 경사가 났습니다.”
“…S급?”
“S급.”
“제가?”
“댁이.”
“왜?”
“맨눈으로 제 병을 간파하셨잖아요.”
“고작 그걸로요?”
바이탈은 물론이고 기의 흐름까지 단번에 읽혔는데 고작이라니. 임소병이 쓰게 웃었다.
“그, 그럼 저도 당신처럼-.”
“저요? 저는 대가리 쪽이고요. 아버지와 비슷하실 겁니다. 단지 길드장께서 물건을 간파하듯 소소 학생은 사람의 생체 정보를 보시겠죠.”
“미쳐요?!”
“아, 그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직 각성 초입인데다 시간이 충분한걸요. 댁 아버지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임소병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골랐다. 골칫덩이 문제를 떠올리듯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전생의 기억을 찾은 옛 무인이 우리 뿐만은 아닐테죠. 만약 그 치가 살아있다면 암존 역시 기대해볼만 하고…. 암존의 소생이라면 의료계열 능력이 하나쯤은 반드시 있을 테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찾아보십쇼. 혹시 압니까? 제자로 삼아줄지. 길드장께도 꼭 말하시고요. 부녀가 같은 외눈안경을 맞추는 것도 볼만하겠네.”
“걱정 하실텐데.”
“걱정 좀 끼쳐도 됩니다. 오히려 좋아할 걸요. 아버지란 족속이 그래.”
“아저씨 같아….”
“이만하면 길드장께 비밀로 부치는 값으론 충분하겠죠?”
당소소의 앞으로 둥실둥실 끊어진 머리끈이 배달왔다. 그녀가 불만이 그득한 표정으로 콱, 뜯어진 제 머리끈을 채왔다. 이설 언니가 준 건데.
“알았어요.”
“어휴, 십년감수했네. 그럼 전 이만 준비하러 갑니다?”
“준비라뇨?”
“작전 짜야죠. 소소 학생 덕에 몸 상태도 좋아지고 잠도 푹 자서 머리도 맑아졌겠다, 가뿐합니다.”
“퍽이나….”
어휴. 꿈 좀 꿨다고 수건 밖으로 나오지 못할 땐 언제고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뺀질뺀질한 얼굴에, 대놓고 한숨을 쉰 당소소가 긴 좌석에 완전히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보니 이 비행기 누구거랬지. 저 인간인가. 남궁만큼 돈 많은 거 아냐? 도착하면 걔네도 보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인기척은 저만치 멀어지는데 발걸음 옮기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녹림왕은 언제나 그렇게 걸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사형의 뒤에서.
“꿈.”
나지도 않은 발걸음 소리가 우뚝 멈춘 것만 같았다. 이것도 그녀가 ‘너무 많이’ 보는 걸까.
“많이 꾸세요. 될 수 있는 한.”
기억을 거부하면 안 돼. 계속 버티다간 질식할거야. 그런 속뜻은….
“노력해보죠.”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당신은 예전부터 우리 모두를 지켜 보던 사람이니까. 한 사람을 대신해서.
‘그래서 미쳐버린 걸까?’
찜찜하던 미련이 깨끗이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고집불통인 남자였다. 당소소는 저 남자를 도울 수 없다. 그녀에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다시 모은 가족. 새로운 가족. 진실을 간파하는 그녀의 거짓말쟁이 아버지. 모두 불가능했다. 임소병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가능한 사람은 오로지….
“사형.”
빨리 와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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