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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소병청명] 그래서 뭐였냐?

by 헝그리고라니 2025. 3. 18.

※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며 살아온 임소병과 수많은 사지를 거슬러온 청명이 마지막 순간에 대해 얘기합니다

※ CP / NCP 자유

 

 

 

 

쿵.

 

어린애 키만한 서류뭉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마침내 사방이 서류로 둘러 막힌 임소병이 퀭한 눈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흐려 앞에 선 자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는 힘없이 버석한 입술을 움직였다.

 

"⋯뭡니까?"

"일."

 

축시에 녹림왕 집무실 창문을 타고 들어올 사람이 하나 말고 더 있나.

 

"⋯설마 제 거요?"

"그럼 내가 나 일 많다고 자랑하려 들고 왔겠냐?"

"아니겠죠?"

"아니지."

 

하하하. 하하하하. 천우맹 실질적 대가리와 공동 부대가리가 나누는 것치고 흐리멍텅한 만담같은 대화였다. "아 그렇지!" 녹림왕이 퀭한 눈을 반짝 뜨며 손바닥에 주먹을 통 치더니, 주변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 오셨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었는데."

"짧게 해, 바빠."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디보자 이게⋯ 아, 찾았다."

 

탁. 임소병이 던진 두루마기를 잡아 챈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두꺼워?"

"당장 읽으실 필요 없습니다. 별거 아니니까."

"뭔데."

"제 유서요."

 

사인은 양심이 죽 쑬 래도 없는 악덕 말코 새-.

 

따아아악!

 

두루마기에 정수리를 얻어맞은 임소병이 머리를 감싸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청명도 분노로 떨었다. 쾅! 둘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새파란 새끼가 뭐, 유서? 유우우우서?"

"새파랗긴 하지! 누구 덕에 과로사로 총각 귀신되기 직전인데!"

"너만 힘드냐? 너만 힘들어?"

"아 누가 일 안 한 댔나? 그냥 일하다 콱 죽겠다고! 뭐가 문제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바락바락 대드는 임소병은 연이은 철야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꽝!

 

"끅."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어딜 내 허락도 없이 먼저 죽어, 사파 새끼가 버릇없게!"

 

제정신 아니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정수리가 찌그러진 임소병이 꽥 소리쳤다.

 

"아 맘에 안 들면 나 죽고 삼도천 와서 따지시든지!"

"뭐야?"

"못 하시겠죠? 왜냐! 댁은 도사라 등선할거고 나는 사파라 선계 근처도 못 갈테니까. 으하하하 꼴좋다, 정파 새끼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하하하! 하하하하하!

 

"⋯많이 힘드냐?"

 

주르륵. 미친놈 동정하는 듯한 그 한 마디에, 허리에 손을 얹고 광소를 터뜨리던 임소병이 웃는 얼굴 그대로 눈물을 줄줄 뽑아내며 의자 위로 무너졌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쯧쯧쯧. 이거 완전히 갔네, 갔어. 청명은 두루마기를 허공에 툭툭 던졌다 받으며 핀잔을 줬다.

 

"니가 아직 덜 바쁘지? 이딴 거 쓸 시간 있으면 잠이나 처 자. 한참 전쟁 중에 이제 와서 죽을 각오니 뭐니⋯."

"이제 와서라뇨? 미리 써 놓은 겁니다 그거."

 

탁. 둔탁한 소리가 멎었다.

 

"⋯미리?"

"예에. 수정은 최근에 했지만, 처음 쓴 건 한⋯ 지학(15세) 쯤 되나?"

"꼬맹이 나이에 유서를 썼다고?"

 

흐느적 몸을 늘어뜨린 임소병이 짐짓 울상을 해보였다.

 

"잊고 계신 줄은 알았지만 저, 시한부였습니다?"

 

살려준 대가로 피 한 방울 안 남게 쪽쪽 빨아 먹었으면 그 정도는 좀 기억해 줍시다 좀. 서러워서 진짜. 어느 집 정파 도련님은 아비 좀 잃었다고 술 따라줘, 위로해줘, 세상에 군까지 키워주더만 왜 나는⋯⋯. 우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린 청명은 그제야 흥미가 생긴 듯, 수북한 서류를 대강 밀치고("아 무너집니다!") 책상에 걸터앉았다.

 

"흠."

 

예상은 했지만.

 

"유서보단 계약서군."

"계약서보단 지침서죠. 글자만 아는 놈이라면 따를 수 있는 수준이니까. 제가 죽어도 녹림은 어떻게든 굴러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갈아 엎은 것도 많은데."

"그래도 그렇지, 후계도 없는 마당에 차기 녹림왕이 누가 될 줄 알고 이런 걸 남겨 놓냐?"

"녹림왕 되겠다는 놈이면 글 정도는 읽을 것이고, 이게 녹림에 유용하리란 것 정돈 이해하겠지요. 그것도 모르면 뭐, 뒈져야지. 피바람 몇 번 불고 나면 적당한 놈 손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내 말은."

 

청명이 굽힌 무릎 위로 턱을 괴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 차기 녹림왕이 네 목을 벤 놈일수도 있다는 거야."

 

알 만한 새끼가. 누군지도 모를 놈을 위해 유서를 썼다고? 지학에?

 

그러자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절맥이 발현한 때가 충년(10살)이었습니다."

"보통 그쯤이지."

"신분을 숨긴 것은 열셋. 그때부터 선대를 지지하는 녹림십영의 몸집을 미리 불려 놓기 위해 중원을 돌며 산채를 정리했지요. 뭐, 말이 정리지."

"숙청?"

"예."

"왜?"

"필요했으니까."

 

목소리는 찻물처럼 고요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는 선대가 돌아가시자마자 약관도 못 되어 죽었을 겁니다. 아시겠죠?"

"뭘?"

"제게 죽음이란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그가 부채로 머리를 긁으려다 텅 빈 손을 알아채고, 소매를 뒤적이며 태평히 읊었다.

 

"시작부터 시한부 인생에, 언제나 정체를 숨기며 목을 지켜야했죠. 오직 필요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거둔 만큼, 제 목숨도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거두어 지리라 늘 예상했습니다. 뭐 그게 과로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

"원하는 사인 불러봐. 맞춰서 보내 준다."

"하지만! 강자존이란 원래 그런 것이죠!"

 

황급히 말을 바꾼 임소병이 부채를 촥 펼치고, 씩 웃으며 연극조로 말했다.

 

"칼을 휘둘러 탐을 취한 자! 어떤 식으로든 그 칼을 돌려받는 것이 섭리일진데, 억울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하, 섭리? 조만간 등선도 하겠다."

"에이, 도교 쪽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 믿는 사파 보셨습니까? 천망회회 소이불실(*하늘의 그물은 넓고 커서 엉성해 보이지만 빠뜨리지 않는다)같은 개소리가 또 없지. 하늘이야말로 업무태만의 상징 아닙니까?"

 

검지로 위를 손가락질한 임소병은 금세 단정한 자세로 고쳐 앉고선 빙그레 웃었다. 얇은 눈이 서늘히 빛났다.

 

"저는 사파의 섭리를 말하는 겁니다."

 

사파. 살아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

 

생존이 최우선이라는 것은 그만큼 언제든 덮쳐올 죽음을 가정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파만큼 생존을 끔찍이 갈구하는 동시에, 죽음을 체화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또 있을까?

 

'하나 있다면⋯.'

 

임소병의 시선이 청명을 향했다. 어이쿠, 눈썹 부라리는 것 보게. 인내심이 다했군. 임소병은 깔끔히 부채를 접어 손바닥을 쳤다.

 

"각설하고. 절 죽인 놈이든 아니든 원망할 것도 없으니, 그저 사파 우두머리답게 틈틈히 사후를 준비해왔다 이겁니다요. 겸사겸사 천우맹 건도 더한 김에 미리 보여드리는 거고."

"천우맹은 왜?"

"아시잖습니까. 이쪽이 더 문제인 거. 녹림이야 왕 좀 바뀐다고 싸그리 무너지진 않죠. 도장 말마따나 여긴 원래 그런 데니까. 근데 천우맹은 죄다 멧돼⋯."

"말 잘해라."

"⋯아니, 인정할 건 하십쇼. 솔직히 제 뒤로 책사 맡길 놈이 있냔 말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본인 사망 시 대비책까지 손수 끼워 넣었겠냐고! 너무 자세히 쓰는 바람에 우리 애들 글자 가르치는 것보다 힘들었구만!"

"어디쯤 적었는데?"

"안 가르쳐 드릴랍니다."

"다 읽고 녹림도 같이 챙겨달라?"

"헤헤, 겸사겸사지요. 누이좋고 매부좋고."

"이게 벌써 홀랑 튈 생각 만만해가지고."

"악! 만약을 말하는 겁니다, 만약에!"

"만약에."

 

돌연, 청명의 낮은 목소리가 집무실을 갈랐다. 과장스럽게 양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던 임소병은 일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아, 또다.

 

땅에 박힌 칼날같은 목소리.

 

청명의 안에 숨어있는 목소리.

 

"네가 홀로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면."

 

호롱불이 흔들리며, 청명의 왼쪽 반신이 어둡게 그늘졌다. 

 

"그때 네가 각오해야 할 건 죽음이 아니야."

"⋯그럼?"

"사는 것."

 

임소병이 눈을 깜빡였다.

 

"사는 것이요?"

"그래."

"아니 그것도 상황 나름이지, 무용한 발버둥을 치느니 깔끔히⋯."

 

문득, 임소병은 수많은 순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문다. 청명이 사지에 놓이고 천우맹이 그를 구출한 셀 수 없는 순간을. 옥쇄를 각오한 맹도들과 임소병 자신이 끝끝내 찾아낼 때마다, 매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줄을 타듯 위태로이 휘청대던 청명을.

 

늘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있던⋯.

 

기적, 이었을까?

 

임소병이 뭐라 말을 더 잇기도 전에, 화르륵! 불씨가 타올랐다. "뭐⋯ 뭐하시는!" 삼매진화를 일으킨 청명이 반쯤 탄 두루마기를 그의 품에 내던졌다. 임소병이 일생에 걸쳐 적어 내린 수많은 대비책이 재가 되어 바닥으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청명이 심술궂게 코웃음쳤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어차피 네가 거기 적어둔 오만가지 걱정은 하나도 생각 안 날 거다. 원시천존한테 살려달라 비느라 바쁠걸?"

"그거 자살행위 아니요? 하늘이 사파 새낄 왜 돕습니까, 이때다 싶어 지옥에 처박겠지!"

"부르게 될 거야. 그때 넌 사파가 아닐테니까."

"예?"

 

그의 이름이 사파 새끼인줄 아는 듯한 청명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임소병이 눈을 깜빡여도 정작 청명은 태연했다.

 

"그때 네겐 녹림왕이고 사파고, 천우맹의 책사 자리조차 남아있지 않을 거다."

"아니, 그것들을 다 빼면 대체 제게 뭐가 남습니까?"

"그걸 내가 아냐? 네가 알지."

"⋯허?"

"근데 좀 궁금하긴 하네. 그러니까⋯."

 

읏쌰. 책상에서 내려온 청명이 손을 털더니, 창틀에 발을 올리고 등을 보인 채 팔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때가 되면 알려 달라고."

 

그딴 유언으로 퉁칠 생각 말고. 아득바득 비참하고 처절하게 살아남아서.

 

"물어보러 갈 테니까."

 

네 마지막 바람이 뭔지 말이야.

 

**

 

"쏴라!"

 

하늘이시여.

 

"녹림왕 혼자다!"

"한꺼번에 덤벼들어!"

 

내 죄가 무거워 하늘의 그물도 다 담지 못하고

이 끝이 지옥 늪일지라도 마땅히 들어갈 테지만

 

"지원이 오기 전에 죽여버려!"

 

당신의 눈이 조금만 더 오래 나를 빗겨가기를.

 

"책사를 제거하면 천우맹도 끝이다!"

 

부디 그의 모든 여정이 끝나고 나를 벌하시기를.

 

"화산검협에 비하면 별 거 아냐!"

 

비록 나는 그와 같은 용도 아니오.

 

"련주께서 오실 때까지만 버텨!"

 

그와 자웅을 겨룰 뱀도 아니오.

 

"아아악!"

"저, 지독한⋯!"

 

이 땅의 수많은 죄인 중 하나에 불과하나⋯.

 

"⋯⋯미친."

"왜 저렇게까지⋯."

"죽는 게 나을텐데⋯."

 

그 이전에 그의 사람이기에

마지막까지 그의 사람이기에.

 

"죽여라."

"군사!"

"망설여진다면 내가 하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

"그래. 아쉽군, 녹림왕."

 

단 한 번만

 

"지옥에서 만나지."

 

그 사람을⋯.

 

"야."

 

- 그래서 뭐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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